
일본소설 <문을 열면(ドアを開けたら)>을 읽었다.
여성소설가 오사키 코즈에(大崎梢)의 작품이고 일본에선 2018년 9월에 단행본이 발간됐다.

쇼덴샤(祥伝社)에서 간행하는 월간 소설잡지 <쇼세츠논(小説NON)>
2017년 10월호부터 2018년 7월호까지 10회분이 연재된 후 동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됐다.
잡지 연재시에는 후지타 미나코(藤田美菜子) 일러스트레이터의 삽화가 매회 삽입됐다.
본 포스트에 게재한 잡지의 삽화와 컬러 원화는 후지타 미나코 씨 블로그에서 가져온 것이다.

소설 문을 열면의 장르는 코지 미스터리(cozy mystery)다.
코지 미스터리란 형사나 탐정이 아닌 아마추어 주인공이 사건을 추리, 해결하는
비교적 가볍고 편안한 느낌의 미스터리물이나 추리소설을 가리킨다.
주인공 츠루카와 유사쿠(鶴川佑作)는 1년 전 직장을 그만둔 50대의 중년남성이다.
카나가와현 요코스카시의 엑셀빌라사쿠라공원 아파트에서 쭉 살아왔던 그는
이제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노모가 살고 있는 고향의 본가로 돌아갈 생각이다.
츠루카와는 부동산에 집을 내놓았고 이삿짐을 정리하던 중에
친하게 지내는 같은 아파트의 이웃 쿠시모토(串本) 씨에게서 빌린 사진잡지를 발견한다.
쿠시모토 씨는 70대의 노인이지만 츠루카와처럼 독신남이어서인지 서로 통하는 점이 많았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아파트는 72세대 규모의 6층 건물이고 ㄷ자 형태의 구조물이다.
츠루카와는 502호에 살고 있고 쿠시모토 씨는 ㄷ자 빈 공간 너머 맞은편의 511호의 주민이다.
오후 9시가 지난 시각이었으나 아직 잠자리에 들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하여 츠루카와는 잡지를 들고서 일어섰다.
511호의 벨을 눌러도 대답이 없기에 혹시나 싶어서 문손잡이를 돌려보았는데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종종 있는 일이다. 츠루카와는 쿠시모토 씨의 이름을 부르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 복도를 지나서 거실로 들어선 츠루카와는 그곳에 쓰러져서 차갑게 식어 있는 이웃을 발견하게 된다.
경찰에 신고하거나 구급차를 불러야 한다고 반사적으로 생각이 들었으나
거실을 둘러보니 식탁 위에는 찻잔이 두 개 놓여져 있었고 바닥에는 어지럽게 벗어 놓은 슬리퍼가 있었다.
누군가가 방문했다가 황급히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자 츠루카와는 사건일 가능성을 의심하게 된다.
츠루카와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511호를 나와서 자신의 집 502호로 돌아온다.
쿠시모토 씨에게는 미안하지만 경찰이 찾아와서 아파트가 소란스워지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집을 내놓은 상태라서 아파트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문이 생기면 곤란했다.
그러나 친한 이웃의 죽음을 이대로 모른 체하기에는 마음이 개운치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일단 오늘밤은 그냥 지내자. 누군가가 쿠시모토 씨를 발견하고 신고해줄지도 모른다.
내일까지도 조용하면 그때 내가 신고하자. 이렇게 츠루카와가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어보니 고등학생 쯤 되어 보이는 처음 보는 남자애가 서 있었다.
사사키 히로토(佐々木紘人)라는 이름의 소년은 츠루카와에게 말했다. "511호에 들어갔다 나오시는 걸 봤습니다."

이 소설은 나이차로는 부자뻘이 되는 50대의 중년남과 고교 2학년 남학생이
우연인지 운명인지 콤비가 되어서
이웃집 독거노인의 죽음과 관련된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려내고 있다.
코지 미스터리답게 주인공부터 주변인물까지 독자의 일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단 후반부의 초등학생 실종사건이 맞물리면서부터는 흔하지 않은 캐릭터도 등장하기는 하지만.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미혼이나 늙어서 혼자가 된 독거노인의 1인가구가 증가하는 추세이기에
고령자가 많은 이웃나라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고독사에 관한 관심이 필요해진 시대다.
이 소설은 주인공의 이웃인 독거노인 쿠시모토 씨의 죽음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1인가구 고독사에 관한 사회적 경종을 울리고 있다.
그나마 쿠시모토 씨는 사진 찍는 것이 취미여서 사진 동호회 모임에 참가하기도 하고
반상회 모임에서 알게 된 주인공 츠루카와와 사진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친해지기도 하여
노년의 일상이 고독하지만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쓸쓸하고 외로운 노년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처럼 다양한 모임에 참가하여 대인관계를 유지하거나
어울리는 게 적성에 맞지 않는 경우에는 혼자서 즐길 수 있는 취미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 문을 열면은 컵라면이 먹고 싶어지는 소설이기도 했다.
처음엔 협박하는 쪽과 당하는 쪽의 관계처럼 시작된 츠루카와와 사사키였지만
쿠시모토 씨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함께 풀어나가면서 점차 서로에게 마음을 터놓게 되는데
츠루카와의 집에서 두 남자가 함께 컵라면을 먹는 장면이 여럿 등장한다.
라면을 함께 먹으면 동성 간에는 우정, 이성 간에는 사랑의 친밀도가 상승하는가 보다.
그래서 여자들이 남자에게 라면 먹고 갈래 하고 물어보는 걸까.

탐정이나 형사 같은 프로페셔널에겐 전문적인 수사장비나 인적 네트워크가 갖추어져 있겠으나
코지 미스터리의 주인공인 아마추어 일반인이 수사를 하기 위해서는 어떤 장비가 필요할까.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화되었기에 먼 곳을 관찰하기에는 망원렌즈를 장착한 디카만큼 편한 것도 없겠으나
눈에 잘 띄지 않게 휴대하기에는 예나 지금이나 쌍안경은 좋은 장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흰 고양이 릴리는 쿠시모토 씨의 옆집 503호에 사는 누마타(沼田) 씨의 반려묘다.
베란다를 놀이터 삼아서 배회하는 고양이가 사건의 실마리를 푸는 단서를 제공할 때
집사나 애묘가들은 역시 고양이는 영특하고 영묘한 동물이라며 찬사를 보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스미레(제비꽃)의 꽃말은 사랑이라고 한다.
소설 문을 열면은 코지 미스터리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함께 사는 세상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소설이라서 미소 지으며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지인의 죽음을 바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주인공의 미적지근한 태도가 처음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런 만큼 주인공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서 지인의 죽음과 관련된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여 애쓰는 모습을 지켜보며 어느새 그를 못 미덥게 여겼던 마음은 풀리고 응원을 보내게 되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 채 바쁘고 삭막하게 살아가는 오늘날의 차가운 도시인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간직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세상은 살 만하다고도 하는 것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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