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주말에 정동극장에서 뮤지컬 <낭랑긔생>을 관람했다.

올해 초연하는 뮤지컬 낭랑긔생은 정동극장 제작,
조은 작, 강유미 연출, 류찬 작곡/음악감독, 류정아 안무이고 공연시간은 100분이다.

1922년 6월 22일 동아일보 3면에 단발랑(斷髮娘. 단발한 젊은 여자)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한남권번의 강향란(姜香蘭)이라는 기생이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남성양복을 입고 시내를 돌아다닌다는 내용이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하여 조선 최초의 단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뮤지컬 낭랑긔생이 만들어졌다.
뮤지컬 낭랑긔생의 주인공은 한동권번의 강향란(姜向爛)이다.
가상의 권번 이름을 사용했고 주인공의 한글 이름은 같으나 한자를 다르게 사용함으로써
실존인물을 모델로 하지만 내용은 픽션임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다.
向爛은 빛이 있는 곳으로 향하다는 의미로서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신여성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하겠다.
권번(券番)은 일제강점기에 기생조합을 일컫던 일본식 명칭이다.
기생이 관아에 소속되어 관리됐던 관기제도가 1909년에 완전히 폐지되자
기생들은 생계를 위해서 조합을 형성하게 된다.
1909년 4월 한성(서울)에서 만들어진 한성기생조합(광교기생조합. 한성권번)이 최초의 기생조합이었다.
1918년에 일제는 기생조합들에게 명칭을 일본식 이름인 권번으로 바꾸도록 명령했다.

한동권번의 권번장 차순화 역 홍륜희 배우.
공연은 연홍관에서 열리는 연회의 흥을 돋우기 위해서 무대에 초대된 한동권번 기생들의 노래와 춤으로 막을 올린다.
홍륜희 배우는 뮤지컬 <투모로우 모닝>에서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객석을 휘어잡는 매력을 보여준 바 있는데
역시나 이 작품에서도 시원스러운 창법으로 그녀만의 카리스마를 뽐내며 무대를 장악하는 파워를 보여주었다.
기생은 춤과 노래와 악기연주 등 전통예술을 섭렵한 예인(藝人)이었다.
기생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연예인이라 할 수 있는 직업군이었고
매춘을 주업으로 하는 유녀(遊女)와는 엄연히 구분되었다.
순화는 자긍심을 갖고서 후배 기생들을 양성하는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여장부로 그려진다.

한동권번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강향란 역 김주연 배우.
강향란의 원래 이름은 간난이다.
술과 노름에 빠진 아버지와 병석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시장에서 삯바느질하며 집안의 생계를 꾸려나가는 당찬 처자였다.
별다른 의미도 없이 흔하디 흔한 간난이라는 이름처럼 그녀의 인생 또한 그렇게 흘러갔을 수도 있겠으나
간난이 아버지의 노름빚 때문에 팔려갈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 때
시장을 지날 때 바느질하며 노래하던 간난의 모습을 눈여겨 보았던 순화가 그녀를 사서 권번에 들인다.
향란이라는 이름은 그녀에게 기생으로서 살 기회를 준 순화가 지어준 기명이다.
김주연 배우의 뮤지컬 무대는 힐링 뮤지컬로 잘 알려져 있는 <빨래>에서 처음 만나봤었다.
뮤지컬 빨래에서 여주인공 나영이 취객들과의 실랑이 때 동남아 여성들을 돈 주고 사오는 국제결혼에 관하여
"여자가 무슨 물건이에요. 돈 주고 사오게."라며 큰소리로 반박하는 대사가 있는데
뮤지컬 낭랑긔생에서도 빚쟁이가 찾아와서 네 아버지가 노름빚 때문에 너를 팔았다는 말을 듣자
여주인공 간난은 울분에 비통해하며 비슷한 대사를 내뱉는다.
아들과 달리 딸은 교육도 제대로 시키지 않고 집안일을 돕는 노동력 정도로 취급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향란은 사회적 폐습에 맞서서 여자도 남자와 동등한 대접을 받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여성으로 거듭난다.

한동권번의 기생 이은희 역 박찬양 배우.
권번은 기생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자
소속되어 있는 기생을 연회와 행사 등에 파견하는 중개인 역할을 했으니
오늘날의 연예기획사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한동권번에 새로 들어간 향란은 이곳에 먼저 적을 둔 두 명의 선배를 만나게 되니 은희와 정숙이었다.
은희는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새내기 향란에게 따뜻하게 손을 내밀었으나
정숙은 텃세를 부리며 갓 들어온 신참자를 괴롭히는 나쁜 선배였다.
어느 조직에 가나 이와 같은 당근과 채찍은 늘 존재하는 법인 것 같다.

한동권번의 기생 조정숙 역 이예지 배우.
권번에 새로 들어온 향란에게 못된 고참 행세를 하는 정숙을 연기한
이예지 배우는 극에 웃음을 더하는 코믹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다.
뮤지컬 <당신만이> 이후 3년 만에 무대에서 만나보았는데
자신만의 개성을 잘 살린 인상적인 연기로 배역을 활성화하여 존재감을 드러냈다.

향란과 정숙 간에는 다소 트러블이 있긴 했지만
은희, 향란, 정숙 세 기생은 좋은 친구 사이가 된다.
시기와 질투를 넘어선 여자들 간의 우정 또한 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 중 하나다.
학교에 다니지 않아서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까막눈이었던 향란은
은희와 정숙에게서 한글을 배우고 더 나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고명순 역 이지해 배우.
작품에선 중반부 이후에 등장하지만 명순은 꽤 의미 있는 캐릭터다.
명순은 현재 한동권번의 수장인 순화와는 기생 시절에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오롯이 예인의 길을 걸었던 순화와는 달리 명순은 기생 시절엔 몰래 독립운동에 가담했었고
현재는 서점을 운영하면서 여성들에게 새로운 문물과 자유로운 사상을 전파하는 데 힘쓰고 있다.
향란은 은희를 통하여 명순과 알게 되고 독서를 통하여 신사상을 흡수하게 된다.
이지해 배우는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시원스런 연기를 하는 배우다.
연극 <우리 노래방 가서 얘기 좀 할까>에서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코믹한 캐릭터가
진지한 인물을 연기할 때에도 중간중간 새어 나와서 웃음을 준다.

이 작품에는 다섯 명의 여배우와 두 명의 남배우가 출연한다.
남자배우들은 각각 두 명의 멀티역을 하는데
남자배우들은 각각 두 명의 멀티역을 하는데
윤성원 배우는 향란을 인신매매하는 사채업자 임시봉과 순화의 연인이었던 독립지사 서정현을 연기했고
노희찬 배우는 권번 기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음악선생 현석윤과
동양척식회사의 일본인 지주 마츠모토를 연기했다.
독립군의 군자금 마련을 위해서 정현은 허위 부동산 매물로 마츠모토를 유인한다.
정현이 권번에서 마츠모토를 접대할 때 순화와 명순이 시중을 들었는데
마츠모토가 순화에게 추근대자 정현이 연인을 지키기 위해서 저지하다가 피를 부르는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이 대목은 작품 속에서 가장 긴장감이 고조되는 장면이었다.

뮤지컬 낭랑긔생의 가장 큰 매력은 음악이라고 하겠다.
정동극장에서 상연되는 공연은 국악을 베이스로 한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단 국악뿐만이 아니라 현대적 감각에 맞추어 양악이 혼합된 퓨전식의 국악도 가능하다.
작년에 관람했던 뮤지컬 <판>의 음악도 국악과 양악이 어우러진 퓨전이었고 낭랑긔생 또한 그랬다.
라이브 연주는 건반에 류찬, 고수영, 해금에 박하늬, 가야금에 김상아, 타악에 도경한 아티스트였다.
마치 구슬이 구르는 소리를 표현한 듯한 음성어 "또로로 또로로"라는 가사가 귀에 감기는
순화와 은희, 정숙이 함께 부르기 시작하여 시장에서 삯바느질하는 간난이가 마무리하는 첫 넘버를 비롯하여
단발 차림으로 연회 무대에 오른 향란이 다부진 각오로 노래하는 끝 넘버까지
감성을 촉촉이 적셔주는 넘버들이 가득하여 음악적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공연이었다.
국악적 느낌이 우위에 서면서도 국악과 양악이 어우러진 매력적인 음악으로 채워졌다는 면에서는
서울돈화문국악당에서 상연됐던 음악극 <적로>와도 좋은 비교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양악을 가미하여 한국 전통의 멋과 맛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음악들은 굉장히 매력이 있다.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반하게 만들 정도로 매혹적인 뮤지컬 낭랑긔생의
라이브 연주는 건반에 류찬, 고수영, 해금에 박하늬, 가야금에 김상아, 타악에 도경한 아티스트가 담당한다.
극 중에 등장하는 우리말로 '바람꽃'이라는 단어가 기억에 남는다.
큰 바람이 불기 전에 먼 산에 구름같이 끼는 뽀얀 기운을 의미하는 말이다.
댕기 머리를 자르고 남자처럼 단발이 되어 변화를 꿈꾸었던 향란이 모던걸의 바람꽃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뮤지컬 낭랑긔생 커튼콜.
출연진은 김주연, 홍륜희, 이예지, 박찬양, 이지해, 노희찬, 윤성원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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