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동극장에서 전통극 <궁 장녹수전>을 관람했다.

궁 장녹수전은 정동극장 제작, 경민선 작, 오경택 연출,
김철환 작곡, 정혜진 안무이고 공연시간은 90분이다.
작년 4월에 초연하여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후 4시 상설공연으로 12월까지 상연되었는데
올해도 3월 중순부터 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오후 4시 상설공연으로 공연시간을 10분 더 확장하여 막을 올렸다.

장녹수(?-1506)는 조선의 제10대 임금 연산군의 후궁으로 유명한 실존인물이다.
시집을 간 적이 있고 아이가 있고 나이가 30대였던 장녹수가 왕의 후궁으로 발탁되었으니
궁녀를 뽑을 때 처녀성 검사까지 했던 시대였던 것을 감안하면 놀랄 만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영화 간신(2015)에서 차지연 배우가 장녹수 역을 연기했기에 원숙미 풍부한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사서에 의하면 장녹수는 서른이 넘은 나이임에도 열여섯으로 보였다고 하니 꽤나 동안이었던 것 같다.

궁 장녹수전은 언어가 불필요한 공연 즉 넌버벌 퍼포먼스다.
따라서 난타, 점프, 판타스틱 등의 공연과 마찬가지로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공연이다.
넌버벌 퍼포먼스인 만큼 배우들이 따로 대사를 말하지 않으므로
스토리 전개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각 장이 시작되기 전에
무대 양옆의 모니터에 이 장에서 펼쳐질 내용을 요약한 자막이 출력된다.
자막은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가 순차적으로 표시된다.

장녹수전이라는 제목이긴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만 다루고 있지는 않다.
사실상 공연의 절반은 스토리와는 관계 없이
사물놀이 등의 전통공연을 선보이며 객석의 흥을 돋우는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
버나돌리기(접시돌리기)나 오자미던지기를 할 때에는 객석의 관객을 무대 위로 불러올리기도 하고
경상도의 보리타작 민요 옹헤야를 부를 때에는 객석에 후렴구 제창을 요청하기도 하고
엿장수의 가위치기 장면에서는 가위 소리의 박자에 맞추어 객석에 박수를 요구하기도 하는 등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여 함께 즐기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 공연이다.

북과 장구 등 타악기를 신명나게 두드리며 우리 소리의 흥겨움을 신바람나게 연주했고

여배우들은 섬세한 손짓과 우아한 춤동작으로 한국적 여성미를 잘 표현해냈다.
특히 한복의 고운 선을 잘 살려낸 춤사위는 한국무용의 매력을 내외국인에게 어필하기에 충분했다.

장녹수가 지닌 춤과 노래의 재능을 먼저 알아본 것은 제안대군(1466-1525)이었다.
제안대군은 조선 제8대 임금 예종(1450-1469)의 둘째 아들로서 왕위를 이을 1순위 후보자였으나
예종이 왕위에 오른 지 13개월 만에 요절하자 왕위를 잇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 등을 들어서
그의 할머니 즉 조선 제7대 임금 세조(1417-1468)의 비 정희왕후(1418-1483)가 반대하여
조선 제9대 임금의 자리에는 예종의 형 의경세자(1438-1457)의 둘째 아들 성종(1457-1494)이 오르게 된다.
왕좌에서 일찌감치 멀어진 이유에서인지 제안대군은 평생 정치와 거리를 두고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장녹수는 노비 출신이다. 제안대군 집의 노비에게 시집을 와서 대군의 노비가 되었다.
아이까지 낳은 장녹수가 기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기량을 알아본 주인 제안대군이 그녀가 기녀가 되는 것을 허락해 주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극 중에서는 풍류에 출중한 제안대군이 장녹수에게 직접 기예를 전수하는 장면이 묘사되기도 한다.
장녹수의 소문이 시중에 퍼지자 연산군(1476-1506)도 변장을 하고서 그녀를 보러 기방을 찾았다.
장녹수의 매력에 푹 빠진 연산군은 그녀를 후궁으로 들였으나 사랑놀음에 빠져서 민생을 돌보지 않게 되었고
왕의 권력을 등에 업고서 기세등등했던 장녹수는 신하들에게 눈엣가시로 여겨지게 됐을 것이다.
신하와 백성들의 불만이 거세지자 폭동의 기운을 예감한 제안대군이
장녹수를 찾아가 궁을 떠나서 함께 도망칠 것을 제안하는 극적 상상력이 이야기에 더해졌다.
얼마 후 중종반정(1506)이 발생하여 연산군이 왕좌에서 쫓겨나고 장녹수도 최후를 맞이한다.

조선 최대의 폭군으로 잘 알려져 있는 연산군과 그의 연상의 여인 장녹수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극 중에서는 영화 간신처럼 연산군의 폭정이나 장녹수의 권세가 따로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단지 왕이 여자에게 빠져서 민생을 등한시하고 향락에 심취했구나
더 나아가서는 신하들이 왕을 바꾸기 위해서 백성들을 선동했구나 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흥청(興淸. 연산군이 전국에서 모집한 기녀)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 해서 흥청망청이란 단어도 생겨났지만
연산군과 장녹수에 관한 사전지식이 없는 외국인 관객들에게는
왕과 그의 연인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걸로 비추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왕과 그의 연인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걸로 비추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궁 장녹수전에서 중요한 것은 연산군의 폭정과 장녹수의 권력남용이 아니다.
자신의 재능을 활용하여 노비 출신에서 왕의 후궁으로까지 지위 상승한 여인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여인을 사랑한 두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궁 장녹수전은 장녹수라는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삼아 그 위에 한국 전통의 소리와 춤을 예쁘게 입힌 공연이다.
한국의 실존 역사와 전통예술을 조화롭게 버무렸다는 점에서
기존의 넌버벌 퍼포먼스 공연들과는 차별화된 특색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다.
북과 장구 등 타악기를 배우들이 직접 연주하는 장면이 많지만
춤과 서사가 위주가 되는 장면에서는 배경음악이 사용되고 있다.
BGM에서 반가운 소리를 발견할 수 있었으니 하윤주 정가 보컬리스트의 고운 음색이었다.
음악극 <적로>에서 여주인공 산월 역을 맡아서 정가(正歌)의 매력을 한껏 들려주었던
그녀의 맑고 깨끗하고 단아한 목소리를 이 작품에서 만나볼 수 있어서 또한 좋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캐스팅보드에 관한 것이다.
정동극장에서는 이전에 관람했던 공연에서도 로비에서 이날 공연의 출연배우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원캐스팅이 아닌 이상 당일 출연배우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 관객들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이날 공연의 장녹수 역은 김혜수 배우였다. 팸플릿에는 더블캐스팅이 명시되어 있으나
티켓예매사이트에는 조하늘 배우 원캐스트로 나와 있던데 수정이 필요할 듯하다.
이날 공연의 캐스팅은 김혜수, 이혁, 전진홍,
박소현, 박지연, 나래, 이승민, 윤성준, 남용우, 이기수, 전준영, 이정대 배우였다.
팸플릿에는 연산군, 장녹수, 제안대군 이들 세 명의 주연 외의 출연진으로
레귤러로 언급한 배우들 외에도 인턴과 객원 배우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긴 하나
캐스팅보드나 출연일정표가 따로 없어서 당일 공연의 출연배우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은 지적하고 싶다.

공연 후엔 로비에서 주연배우들과 함께하는 포토타임이 준비되어 있다.
무용극 궁 장녹수전 커튼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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