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 중순의 주말에 홍대입구역 인근에 위치한 홍대 다리소극장에서 연극 어느 마술사 이야기를 관람했다.

연극 어느 마술사 이야기는 이번이 초연이고
극단 명작옥수수밭 제작, 차근호 작, 최원종 연출이고 공연시간은 110분이다.

연극의 주인공은 해방둥이인 70대의 마술사 이귀환이다.
연극은 일반인과는 달리 초능력을 갖고 태어난 주인공의 인생을 반추한다.
공연이 끝난 후 로비에서 차근호 작가에게 그를 축하하러 온 한 지인이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만들 생각을 했냐며 놀라움을 담은 칭찬의 말을 건네던데
그만큼 이야기는 흥미로웠고 관객들의 반응도 좋았다.
작가가 쓴 작품 중 연극 루시드 드림을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는데 신작 또한 마음에 들었다.

저명한 물리학자의 교수실을 70대의 노신사가 방문하는 장면으로 연극은 시작된다.
교수는 심기가 불편하다.
사전에 연락도 없이 방문한 불청객인 데다가 이런 방문자가 이제까지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교수를 찾아온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초능력자라고 주장했으며
교수에게 물리학으로 그것을 증명해 달라고 요구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교수를 귀찮게 한 자들 중에 단 한 명도 진짜 초능력자는 없었다.
사기꾼을 상대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고 진저리를 내며 교수는 노인에게 나가라고 소리를 쳤다.
그런데 직업이 마술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노신사는 교수의 의중과는 정반대의 말을 했다.
"내가 초능력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시오."
마술사는 한국신문의 최경희라는 여기자가 찾아왔었다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당신이 초능력자라는 제보를 받았고 당신에 관한 기사를 쓸 생각이다.
만약 당신이 초능력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당신이 하는 마술 중에서 하나라도 트릭을 설명해 봐라.
당신은 설명할 수 없을 거다. 왜나하면 당신의 마술은 트릭이 아니라 초능력이니까.
마술사가 언급한 기자는 교수와도 악연이 있었기에 교수는 마술사의 요청을 승낙했다.
교수는 기자를 만났다.
과학전문기자라는 사람이 어떻게 초능력자가 존재한다는 엉터리 기사를 쓸 생각을 했냐고 교수가 윽박지르자
기자는 제보자에게 받은 영상이라며 태블릿을 보여주었다.
1970년대에 촬영되었다는 영상 속에는 마술사의 젊은 시절 모습이 있었다.
젊은 마술사는 손을 대지 않고 물건을 들어올리는가 하면 벽을 통과하기도 했다.

무대 중앙 부분의 뒤쪽으로는 계단을 두어서 배우의 등장과 퇴장시에 여운을 주는 한편 주목도를 높이는 효과를 주었다.
중앙의 좌우로는 각각 테이블과 의자가 위치하는데 단을 설치함으로써 격리된 공간임을 효과적으로 연출했다.
우측 공간은 교수실, 중앙정보부 7호실 등 주로 공적인 공간으로 활용되었고
좌측 공간은 주인공의 집, 카페 등 주로 사적인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교수는 기자와 만난 후 교수실로 마술사를 오라 하여 삼자대면을 한다.
태블릿으로 40여년 전에 녹화된 자신의 영상을 확인한 마술사는 두 사람 앞에서 진실을 털어놓기로 결심한다.

국어교사 역 김기훈, 미술교사였던 마술사의 아내 역 이유하, 간첩 역 박현수 배우.
마술사는 1945년 자신의 출생으로부터 1979년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기까지 자신의 인생사를 시간순으로 회상한다.
주인공이 자신이 가진 초능력에 처음 눈을 뜨게 된 것은 열한 살 소년 때의 일이었다.
세 개의 접시 중 하나에 콩을 넣고서 빠른 손놀림으로 접시들의 위치를 바꾼 후
콩이 들어있는 접시를 맞히면 돈을 따고 못 맞히면 돈을 잃는 야바위 도박을 길에서 마주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소년의 눈에는 어느 접시 속에 콩이 들어있는지 보였던 것이다. 투시력이다.
20대 후반에 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운영하던 시절에 주인공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미술교사를 짝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미술선생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국어교사와 교제하는 사이였다.
학력과 재력 어느 쪽에서도 자신 있게 내세울 것이 없었던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자를 얻기 위하여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았던 중정(중앙정보부)을 찾아간다.
중정에서 초능력부대인 7호실을 신설했다며 주인공에게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던 것이다.
주인공은 20대 초반에 예지력을 활용하여 무역업으로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큰돈을 수중에 넣은 적이 있었으나
주인공의 재산을 가로챌 속셈이었던 부하직원이 그를 간첩이라고 거짓밀고하여 중정에 끌려간 적이 있었다.
염력과 기억을 조작하는 능력을 사용하여 중정을 빠져나오기는 하였으나
자신의 능력이 알려지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이때 깨달았고 이후 눈에 띄지 않게 살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중정 취조실에는 취조 상황을 기록하는 녹음기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주인공은 몰랐다.
녹음된 내용에 의해 주인공이 초능력자임을 알게 된 정부는 줄곧 그의 행동을 감시해 왔던 것이다.
주인공은 중정의 스카우트를 받아들인 대가로 거액의 계약금을 지급받았고 결혼자금으로 사용했다.

어머니 역 박지아, 의문의 남자 역 김병희 배우.
주인공의 아버지는 6.25가 일어나자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종교에 의지하여 마음을 다잡으며 혼자서 억척스럽게 아들을 키워냈다.
박지아 배우는 쩌렁쩌렁할 정도로 성량이 컸고 찬송가를 부르는 장면에서
노래 실력도 괜찮았기에 뮤지컬 무대에서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한쪽 손목이 없는 의문의 남자는 이 이야기의 발단과 마무리에 연관되는 의미심장한 캐릭터다.
출연 비중이 많지 않음에도 관객의 뇌리에 각인되는 것은
절묘하게 이야기를 만들어낸 작가의 역량 때문이기도 하고 배우의 존재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실체가 밝혀지는 결말부는 반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상쾌한 여운을 남겼다.

중정요원 역 오민석, 중정실장 역 김동현, 중정요원 역 이갑선 배우.
두 명의 요원에게선 중앙정보부를 풍자하는 작가의 의도가 느껴졌다.
주인공을 강압적으로 중정에 끌고 온 두 요원은 그를 협박하며 자백을 강요하지만 끝내 거부하자
웃옷을 벗고 소매를 걷어올리며 폭력을 행사할 준비를 한다.
이때 교회 집사라는 한 요원은 주기도문을 외우고 다른 요원은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한다.
종교와 유신정권을 싸잡아서 조롱하는 절묘한 연출이었다.
7호실의 책임자로서 주인공을 스카우트한 강실장은 나라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주인공을 집에 돌려보내지 않고 혹사시켜서 주인공의 부부관계에 금이 가게 만드는 원인제공자이기도 하지만
영부인이 저격당한 것을 예지하지 못했던 실수를 만회하고자
주인공이 김일성을 초능력으로 암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을 때
주인공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그 계획을 만류하는 사려 깊은 인물이기도 했다.
주인공의 과거사 회상의 태반은 중정에서 요원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할애되었다.
간첩을 식별하고 북괴의 동향을 살피는 등 주인공이 의도했던 대로
처음에는 나라를 위한 일에 그의 힘이 사용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만강(주인공의 코드명)의 초능력을 알게 된 다른 요원들이 사적인 부탁을 해 오기도 하고
정부 차원에서도 주가를 조작하라든가 복권당첨번호를 조작하라든가
국익이 아니라 권력층의 사익을 챙기기 위한 요구까지 명령으로 하달하자 주인공은 회의에 빠지게 된다.

기자 역 김나미, 교수 역 유승일 배우.
유승일 배우는 박력 있는 목소리로 성깔 있는 교수를 맛깔나게 연기했고
조용하지만 근엄한 목소리로 각하 역을 연기하기도 했다.
교수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인과율을 믿는 반면
기자는 모든 사건은 그 사건이 관측되기 전까지는 확률로서만 존재한다는 양자역학을 믿는다.
서로 믿는 바가 달라서 으르렁대던 두 사람이 마술사로 인하여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누는 장면이 재미있다.
좋아하는 김나미 배우는 역시나 맞춤복을 입은 듯 맡은 배역을 매력 있게 소화했다.
다음에는 어떤 작품에서 어떤 배역으로 만나보게 될지 궁금하다.

마술사로 신분을 숨긴 초능력자 이귀환 역 남명렬 배우.
젠틀하고 세련된 이미지의 남명렬 배우는 연극을 보지 않는 시청자라 하더라도
아로나민 골드 CF 등으로 낯이 익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접했던 그의 출연작에서는 조연으로만 만나봤었기에
이번 공연에서 처음으로 그의 진가를 제대로 느껴볼 수 있었다.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지만 남명렬 배우는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무대를 지키며
역사의 뒤안길에서 살았던 한 초능력자의 삶을 무대 위에 멋들어지게 그려냈다.
의문의 남자의 대사 중에 날개를 달고 태어났던 아기장수 우투리 설화가 언급되는 대목이 있다.
우투리는 세상을 바꿀 능력을 갖고 태어났지만
그 능력을 두려워한 권세가들에 의해 꿈을 펴 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주인공의 꿈은 평범하고 소박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권력은 주인공의 힘을 이용했고 주인공의 인생에 생채기를 남겼다.
연극 어느 마술사 이야기는 권력이 남용되면 국민에게 해가 미친다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불변의 교훈을 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토리가 흥미로워서 푹 몰입하며 관극할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P.S. 다독하는 배우 남명렬, "편식 없는 책 읽기는 내 연기 밑바탕" - 매경프리미엄 2018년 7월 4일자 기사
연극 어느 마술사 이야기 커튼콜.
오프닝과 엔딩에서는 Ambrosia의 How Much I Feel(1978)이 흘렀다.
옛 연인을 그리워하는 노랫말와 감미로운 멜로디가 어우러져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게 만드는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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