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ライフ 예르미타시 박물관전 2018/03/06 17:12 by 오오카미




지난달 중순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예르미타시 박물관전을 관람했다.
전시회의 부제는 겨울 궁전에서 온 프랑스 미술이다.

전시회를 홍보하는 문구에서는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더불어
러시아의 예르미타시박물관(Эрмитаж / Hermitage Museum)을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소개하고 있다.



순위를 언급하는 글을 보면 확인을 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구글에서 세계의 최고 박물관으로 검색해 보았더니 검색결과로 표시되는 관련 링크들보다도 상위에
구글 자체에서 엄선한 것으로 보이는 박물관 이름과 사진이 51개가 노출되었다.
순위 표시는 따로 없었지만 여러 번 검색해도 노출되는 순서가 똑같은 걸로 보아 왼쪽부터 1위로 보면 될 것 같다.
루브르박물관, 대영박물관,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이어서 예르미타시박물관이 네 번째에 위치하고 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처럼 누가 선정하느냐에 따라서 선정대상과 순위는 달라지는 경우가 많으니
순위에 그렇게 연연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UCITYGUIDES라는 사이트에서 선정한 박물관 순위에서는 예르미타시가 2위에 랭크되기도 했고
많은 사이트의 박물관 랭킹결과에서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있으니 예르미타시가 세계적인 박물관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1703년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는 네바 강 연안의 습지에 자신의 이름과 같은 성인 페트로(베드로)의 이름을 딴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Санкт-Петербу́рг / Saint Petersburg)를 건설했다.
유럽의 전제군주정을 모델로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표트르 1세는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서유럽의 문화와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예술품을 수집했다.
유럽을 향한 창으로 거듭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918년까지 러시아의 수도로서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표트르 1세의 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의 재위 기간(1741-1761)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많은 궁전이 들어섰다.
그중에서도 겨울 궁전은 가장 화려했던 건축물이고 이탈이아 건축가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가 설계했다.
8년이라는 오랜 건설 기간 때문에 1762년에 완공된 겨울 궁전의 주인은 그해 즉위한 예카테리나 2세가 되었다.
그녀는 겨울 궁전 가까이에 은자의 집(Hermitage)으로 불린 작은 별궁을 만들고 이곳에 그녀가 수집한 예술품을 보관했다.
이것이 오늘날 예르미타시박물관의 시초가 되었다.
1787년에 두 번째 건물이 들어섰고 그녀의 재위 기간에 예르미타시는 확장되었다.
현재 예르미타시박물관 건물로 이용되고 있는 이 드넓은 궁전은
열정적인 수집가였던 예카테리나 2세의 유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예카테리나 2세의 초상 - 표도르 로코토프. 1780년대.

계몽군주를 자처했던 예카테리나 2세는 프랑스 철학자 드니 디드로를 비롯한 동시대 저명인사들과 친분을 유지했다.
이러한 인맥을 활용해 그녀는 유럽 각지의 저명한 개인 소장가들의 소장품을 대거 구입했고
특히 프랑스 미술의 옛 거장들과 동시대 화가들의 작품들을 많이 수집했다.
그녀가 생전에 수집한 유럽 회화는 거의 4천여 점에 이른다.
미술품 수집에 대한 열정은 스트로가노프 백작이나 유수포프 공작과 같은 동시대 귀족들에게도 이어져
18세기 말 이후 많은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들이 러시아 공공건물과 상류층 저택을 장식했다.
이러한 개인 소장품들이 20세기 초에 국유화되면서
오늘날 예르미타시박물관은 더욱 다채로운 프랑스 미술 소장품을 보유하게 되었다.


예르미타시박물관전은 박물관의 설립과 프랑스 미술 수집의 역사를 소개하는 프롤로그로 시작하여
1부 17세기 고전주의, 2부 18세기 로코코,
3부 19세기 초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4부 19세기 후반 인상주의로 구성이 되었고
예르미타시박물관의 연표를 정리한 에필로그로 마무리되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박물관 전시회에서 러시아의 문화가 아니라
프랑스와 유럽의 문화가 반영된 예술작품들을 접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소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국력이 강대하면 이처럼 타국의 예술품들을 소유할 수 있다는 약육강식의 진리를 깨달을 수도 있었다.


- 1부 -
고전주의, 위대한 세기의 미술
17세기의 프랑스는 태양와 루이 14세의 통치 아래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던 젊은 프랑스 화가들이 돌아와 왕실 주도의 화단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648년에 설립된 왕립회화조각아카데미는 보편적인 원리와 질서,
안정과 통일성을 중시하는 고전주의 양식을 지도이념으로 채택했다.
이에 따라 그리스나 로마의 고대 예술을 차용하여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주제로 삼았던
니콜라 푸생의 그림이 고전주의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졌다.
풍경화에서는 클로드 로랭이 고전주의의 이념을 충실히 구현한 작가로 명성이 높았다.
고전주의가 17세기 프랑스 화단을 지배했지만
평민들의 일상적 모습을 아상화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그렸던 르 냉 형제의 작품도 큰 인기를 얻었다.



성 체칠리아 - 자크 블랑샤르. 1936년경.

성 체칠리아는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죽임을 당한 순교자로
음악을 연주하는 천사들에 둘러싸여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종교적 주제의 그림이지만 우아하고 세련된 여인의 모습으로 그려진 성 체칠리아는 세속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평온하면서도 안정적인 구도는 블랑샤르의 작품이 바로크 양식을 벗어나 점차 고전주의적 경향으로 기울고 있음을 보여준다.



꽃으로 테를 두른 성가족 - 니콜라 피에르 루아르, 장바티스트 모누아예. 1647 또는 1650년대 이후.

루아르와 모누아예는 파리에 머물면서 태피스트리 공방의 주문을 받아 함께 작업했다.
모누아예는 종교적인 주제에 플랑드르 회화의 영향을 받은 꽃 장식 테두리를 두른 그림을 자주 그렸다.
이탈리아 회화의 영향이 보이는 마리아와 아이의 모습은 루아르가 그린 것이다.



술집의 농부들 - 르 냉 형제들. 1640년대.

17세기의 프랑스 미술에서는 일상적인 장면을 그린 풍속화가 큰 인기를 얻었다.
작은 캔버스 안에서 프랑스 농민들의 삶과 일상을 찬미했던
르 냉 형제는 이러한 풍속화 장르가 생겨나고 유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농부들은 비록 허름한 옷을 입고 있지만 이들의 여유 있는 자세와 위엄 가득한 얼굴에서 내면의 고결함도 드러난다.



이탈리아 풍경 - 클로드 로랭(클로드 줄레). 1648년.

로랭은 이탈리아의 캄파니아 지역 풍경을 여러 차례 그렸다.
목초지에서 돌아오다 강을 건너는 소들의 모습은 로랭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석양이 질 무렵의 부드럽고 따뜻한 빛이 화면 전체를 비추고 있으며 평온한 저녁의 고요함이 가득하다.
로랭은 주로 화실에서 작업을 했지만 야외에서 그린 스케치들을 적극 활용했다.



헤르메스 - 앙투안 쿠아즈보. 18세기.

날개 달린 페가수스를 타고 있는 헤르메스는 루이 14세 시기의 궁정 조작가
앙투안 쿠아즈보가 1701년부터 1702년까지 제작한 대리석 조각을 청동으로 다시 제작한 것이다.



피에르 뱅상 베르탱의 초상 - 니콜라 드 라르질리에르. 1689년 이전.

아르므농빌의 영주 피에르 뱅상 베르탱은 루이 14세 재위 시기의 궁정 회계 담당자이자 유명한 미술 수집가였다.
라르질리에르는 초상화가로서 인기가 많았고 그의 여러 초상화가 동판화로도 복제되었다.



겨울 궁전의 성 조지(St. George) 홀.

성 조지 홀은 예카테리나 2세가 사용할 목적으로 이탈리아 건축가 자코모 콰렌기가 설계하여 1795년에 완성되었다.
1837년의 대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1840년대 초에 러시아 건축가 바실리 스타쇼프에 의해 다시 만들어졌다.
황제의 공식 행사나 연회를 위한 공간에 걸맞은 러시아 신고전주의 건축의 웅장한 실내 장식이 돋보인다.


- 2부 -
로코코와 계몽의 시대
18세기 초, 루이 14세의 사망 이후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침체 속에서
프랑스 화가들은 인간 감정과 자연에 더 많은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야외에서의 화려하고 우아한 연회 장면을 담은 그림들이 인기를 얻었다.
아카데미의 화가들도 풍부한 색채를 사용하면서 신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등 점차 새로운 경향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이로 인해 조개 무늬를 지칭하는 단어에서 온 로코코 양식이 건축과 장식예술을 비롯한 모든 예술분야에서 유행했다.
한편 1730년대 이후 계몽주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가족에 대한 가치, 겸손함, 진실한 감정과 같은 부르주아 계급의 가치를 담은 풍속화나 정물화, 초상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1760년대 이후에는 자연과 단순한 생활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사상이 큰 관심을 끌면서 풍경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도 높아졌다.



디아나의 휴식 - 샤를앙드레 반 루. 1732 - 1733년.

사냥의 여신이자 맹수들을 지배하는 여신 디아나가 사냥을 끝내고 막 돌아와 요정들에게 둘러싸여 쉬고 있다.
화가 집안 출신의 반 루는 초상화를 많이 그렸지만 가장 좋아하는 주제는 신화와 역사였다.
이 작품은 샤르데냐의 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사냥을 할 때 머무르던 성의 침실 천장을 꾸미기 위해 그려졌다.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 샤를앙드레 반 루. 1735 - 1740년.

그리스 신화에서 에티오피아의 왕 케페우스의 부인인 카시오페이아가 신들 앞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자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에티오피아에 홍수를 일으키고 바다괴물을 보낸다.
이때 카시오페이아는 자신의 딸 안드로메다를 바다괴물에게 제물로 바쳤는데
제우스의 아들 페르세우스가 괴물을 물리쳐 그녀를 구하고 부인으로 삼는다.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 - 장바티스트 나티에. 1711년.

이집트 장군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모세서의 이야기는 18세기 초 화가들 사이에서 유명한 소재였다.
특히 침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나티에는 옷을 벗은 젊은 부인의 밝게 빛나는 몸을 강조하고 그림자에 잠겨 있는 요셉을 대조적인 모습으로 표현했다.
나티에는 이 작품을 왕립회화조각아카데미에 제출하여 회원 자격을 얻었다.



거울 앞에 선 젊은 여성 - 자크프랑수아 쿠르탱. 1713년.

쿠르탱은 천진난만하게 노닥거리는 아름다운 아가씨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이는 페트 갈랑트(우아한 연회)를 소재로 한 작품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이 작품에서 모델인 젊은 여성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젊음에 도취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목걸이와 반지를 착용하지 않은 것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
더 이상 인공적인 장식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무대의상을 입은 젊은 여성 - 알렉시 그리무. 1730년대.

그리무의 작품은 엄숙함보다 즐거운 분위기를 풍긴다.
무대의상을 입고 있는 이 아름답고 애교스러운 소녀는 그리무의 여러 작품에서 등장한다.



1, 2부와 3, 4부 전시실의 중앙에는 러시아 출신의 유명인들의 격언과
그들의 책과 음악 등이 전시된 쉬어가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 3부 -
혁명과 낭만주의 시대의 미술
19세기로 접어들어 프랑스 미술은 나폴레옹의 통치와 일련의 혁명을 겪으며 변화의 시기를 맞이한다.
고전적인 단순함과 조화, 대칭과 정확한 직선을 중시하는 신고전주의를 계승한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와
프랑수아마리우스 그라네는 로마에서 르네상스 미술과 건축을 공부하며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만들어갔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화가들이 개인적인 감성에 집중하게 되면서 이상적인 아름다움보다 개인의 미적 기준이 중시되었다.
낭만주의로 불리는 이 경향이 1820 - 1830년대에 확산되면서
화가들은 현실에서 벗어나 문학이나 신화, 동방의 신비로운 이야기에서 새로운 주제를 찾기도 했다.
또한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척점에서 귀스타브 쿠르베는 산업혁명 이후 도시의 일상과 삶을 정확하고 정직하게 그려냈고
장바티스트 카미유 코로나 샤를프랑수아 도비니, 외젠 부댕과 같이
야외로 나간 화가들은 변화하는 빛과 대기에 관심을 두면서 인상주의의 출현을 예고했다.



당구시합 - 루이레오폴드 부알리. 1807년.

이 작품은 프랑스 사회가 격변한 1789년 이후 시기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
제1제정기에 당구장은 사람들이 모여 게임을 즐기고 담소를 나누는 장소였다. 또한 정치, 사회 문제의 토론장이기도 했다.
그림의 주인공은 중앙에서 당구를 치고 있는 여성이다.
이전에는 남자만 당구 시합에 참가할 수 있었던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나폴레옹 1세 시대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공원의 테라스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여인들 - 프랑수아클로디우스 콩트칼릭스. 1850년경.

콩트칼릭스는 이 작품을 통해 19세기 중반에 유행했던 로코코 풍의 패션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그는 수년간 잡지 파리식 유행(Les Modes Parisiennes)의 삽화를 담당하였는데 직물을 재현하는 능력이 특히 뛰어났다.



고대 로마의 노예 시장 - 장레옹 제롬. 1884년.

제롬은 고대 로마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특히 많이 그렸다. 이 작품의 주제도 고대 로마의 노예 시장이다.
작품의 중앙에 여자 노예들이 있고 노예 상인으로 보이는 남성이 이들을 군중에게 선보이고 있다.
부드러운 붓 터치, 섬세한 묘사와 조각 같은 인물 표현은
제롬이 40년 동안 학생을 지도한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의 전형적인 양식이었다.



검투사 - 장레옹 제롬. 19세기.

검투사는 제롬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소재였다.
이 청동상은 처음 1898년 살롱에 전시되었는데 여러 차례 다양한 크기의 청동상으로 주조되었다.



안나 오볼렌스카야의 초상 - 에밀 오귀스트 샤를 카롤뤼스뒤랑. 1887년.

상류층의 초상화가로 명성이 높았던 카롤뤼스뒤랑은 아카데미즘 전통에 기반하면서도
밝은 색채를 통해 인상주의 화가들의 기법을 결합하고자 했다.
작품의 주인공은 국가평의회 의원이자 상원의원인 알렉산드르 오볼렌스키 공작의 부인, 안나 오볼렌스카야이다.


- 4부 -
인상주의와 그 이후
19세기 중엽 이후 고전적 예술 양식과 완전히 결별한 혁신적인 화가들이 등장했다.
클로드 모네, 알프레드 시슬레,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등 이른바 인상주의 화가들은
순수한 색채로 변화하는 빛과 자연의 움직임, 도시의 일상을 포착하여 현대적 삶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였다.
1880년대 이후 모네는 대상의 형태보다 빛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하는 색채의 표현에 더욱 집중했고
폴 세잔은 자연을 본질적인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하는 방식을 탐구했다.
1886년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 이후 세잔이 사망한 1906년까지를 후기 인상주의 시기라 할 수 있는데
이 시기에는 다양한 화풍을 보여주는 화가들이 활동했다.
예언자라는 의미의 나비파를 이끌던 상징주의 화가 모리스 드니,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원시주의 화가 앙리 루소,
1890년대 말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정물화를 그렸던 야수주의 화가 앙리 마티스는
인상주의 이후의 혁신을 이어나갔고 이들은 20세기 미술을 향한 새로운 길을 열었다.



지베르니의 건초더미 - 클로드 모네. 1886년.

모네는 자신의 생애 후반을 지베르니에서 보내며 농촌의 풍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작품은 건초더미를 주제로 그린 작품 중 초기 작품과 이후의 연작 사이에 있는 작품이다.
화가는 능숙한 솜씨로 구름 낀 하늘과 바람이 부는 가운데 지평선이 밝아오는 순간을 포착했다.



여인의 얼굴 - 오귀스트 르누아르. 1876년경.

여인은 르누아르가 가장 즐겨 그렸던 소재 중 하나다.
그가 모델로 삼은 파리의 여인들은 고상한 자연스러움을 지닌 존재였다.
그들의 신분은 다양했지만 르누아르는 이들을 가족과 같은 모습으로 표현했다.
즉흥적으로 완성한 이 작품은 모델의 생생한 인상을 담고 있다.
흐르는 붓칠의 자유로움과 부드러운 색조, 빛과 공기의 효과는 이 시기 르누아르 작품의 특징이기도 하다.



마른 강 기슭 - 폴 세잔. 1888년.

세잔은 1888년 여름 마른 강을 여행하고나서 나무와 물을 결합한 풍경화를 그리게 된다.
인상주의자들은 가변적인 자연의 상징으로 파편화된 수면을 그렸다.
이와 달리 세잔의 그림에서 물결은 고요하며 마치 거울처럼 거의 정확하게 풍경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자연의 일시성이 아니라 영속성을 포착하고자 했던 세잔의 태도를 보여준다.



겨울 궁전 - 베르나르 뷔페. 1992년.

베르나르 뷔페는 뚜렷한 윤곽선과 검은색이 주를 이루는 그래피즘 회화를 제작했던 화가이다.
이 작품은 뷔페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에서 받은 인상을 바탕으로 그린 것으로
원색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는 그의 후기 경향을 보여준다.
뷔페는 또한 수직선을 활용하여 바로크 양식의 겨울 궁전을 뷔페 특유의 고딕 양식으로 변형시켰다.
그는 199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개인전은 끝낸 뒤 이미 판매가 된 겨울 궁전을 다시 그려 예르미사티박물관에 기증했다.



전시실의 출구 앞에는 이 전시회를 기념할 수 있는 스탬프가 놓여 있었다.

예르미타시박물관전은 세계 유수의 박물관인 예르미타시가 소장하고 있는 프랑스 미술품들을 통하여
러시아 귀족들이 향유했던 프랑스 예술을 체험해볼 수 있는 전시회였다.
출품된 회화와 조각 작품의 수가 89개로 다소 적은 감이 있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전시실 내부에서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는 점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단 카메라는 안 되고 휴대폰으로만 촬영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림 옆에 붙어 있는 해설 태그가 잘 되어 있다는 점도 칭찬하고 싶다.





덧글

  • 준짱 2018/03/16 10:16 # 삭제 답글

    예르미타시라니 반가운 전시네. 좋은 그림 많이 보고 왔구나.
  • 오오카미 2018/03/16 11:55 #

    예르미타시 박물관을 직접 다녀온 너에겐 새발의 피일 수도 있겠다. ^^
    400여개의 방에 전시된 300만 점의 예술품을 다 보려면 27km를 걸어야 한다니 직접 보지 않고는 상상이 안 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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