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의 마지막날에 대학로 스튜디오 76(구 이랑씨어터)에서 연극 분장실을 관람했다.

연극 분장실(楽屋)은 일본 현대연극의 거장 중 한 명인 극작가 시미즈 쿠니오(清水邦夫. 1936-)의 대표작이다.
시미즈는 1956년에 와세다대학교 문학부 미술과에 입학했고 58년에는 문학부 연극과로 전과했다.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던 그의 큰형이 조그마한 학생극단을 이끌고 있어서 그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연극과로 옮긴 것을 기념하여 시미즈는 그의 첫 번째 희곡 서명인(署名人. 1958)을 썼고 공모전에 응모했는데
이 처녀작은 와세다대 학부생을 대상으로 하는 와세다연극상(早稲田演劇賞)뿐 아니라
연극잡지 테아트로(テアトロ)에서 주최하는 테아트로상까지 수상하게 된다.
첫 희곡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이다. 이 작품을 계기로 연출가 쿠라하시 타케시(倉橋健. 1919-2000),
극작가 아베 코보(安部公房. 1924-1993) 등 연극인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하게 된다.
시미즈는 쿠라하시에게 소개 받은 극단 세이하이(青俳)를 위해
희곡 내일 그곳에 꽃을 심자(明日そこへ花を挿そうよ. 1959)를 썼고 이 작품은 그의 첫 연극 상연작이 된다.
또한 이 극단을 통하여 후에 콤비를 맺게 되는 연출가 니나가와 유키오(蜷川幸雄. 1935-2016)를 알게 된다.
시미즈가 원체 과묵한 타입인 데다가 연장자 앞에선 더욱 말수가 적어졌기 때문에
극단측에서 그와 동년배인 니나가와를 시미즈 담당으로 붙였다고 한다.
더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시미즈 유키오의 작품을 다시 접한 후 작가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해도 좋을 것 같다.
시미즈를 이야기할 때 자연스레 함께 언급이 되는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연출가 중 한 명이었던 니나가와 유키오는 2년 전에 타계했다.
그는 2014년에 무사시(ムサシ), 2015년에 미야자와 리에(宮沢りえ) 주연의 해변의 카프카(海辺のカフカ)로
국내 내한공연을 연출했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그가 연출했던 당시 공연을 관람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아쉽게 느껴진다.
연극 분장실의 원제는 楽屋〜流れ去るものはやがてなつかしき〜(분장실-흘러가는 것은 머지않아 그립다)이다.
가쿠야(楽屋)는 공연 또는 촬영을 준비하는 배우와 출연진이 대기하는 공간을 가리키는 단어다.
휴식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고 의상을 갈아입고 분장을 하는 공간이기도 하니 요즘 말로는 출연자 대기실에 해당하겠으나
작품의 배경이 연극 공연장에 딸린 여배우들의 휴식공간이므로 분장실이란 제목이 보다 어울린다고도 할 수 있겠다.
연극 분장실은 일본에서 누계 상연횟수가 가장 많은 연극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1977년 초연 이후 지금까지 몇 회나 무대에 올랐을까 궁금하여 대략적인 수치라도 찾아보려고 애썼으나
수치가 나와있는 자료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연극 분장실에 누계 상연횟수가 가장 많은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사실이다.

2016년에는 18개의 극단이 참여하는 분장실 페스티벌이 개최되었다.
2주 동안 하루에 평균 5회씩 18개 극단이 돌아가며 오직 분장실만을 무대에 올린 이색적인 연극축제였다.
이 축제 기간 동안에만 분장실이 총 63회 상연되었으니 얼마인지 궁금한 누계 상연횟수가 늘어난 것은 분명하다.

일본드라마 트릭(トリック)의 가발 쓴 형사 야베 켄조(矢部謙三) 역으로 잘 알려진 배우
나마세 카츠히사(生瀬勝久)가 연출을 맡았던 2009년의 분장실 포스터.
코이즈미 쿄코(小泉今日子), 아오이 유우(蒼井優), 무라오카 노조미(村岡希美), 와타나베 에리(渡辺えり)가 출연했다.
분장실은 일본의 국민연극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연극이 아닐까 싶다.

대학로 스튜디오 76에서 막을 올린 연극 분장실의 공연시간은 70분이다.
극단 RM컴퍼니에서 제작했고 송훈상 극단 대표가 연출을 맡았다.
도유정, 홍부향, 김은영, 유소라 네 명의 여배우가 출연한다.

막이 오르면 무대 왼쪽의 화장대에 여배우 A(도유정)와 B(홍부향)가 앉아서 열심히 화장을 하고 있다.
A는 예쁘장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머리에 상처가 나 있고
B 역시 목에 붕대를 감고 있는데 피가 배어 있어서 어딘가 어색하다.
잠시 후 여배우 C(김은영)가 들어오더니 체홉의 연극 갈매기의 여주인공 니나의 대사를 연습한다.
갈매기의 도입부에서 꼬스챠가 쓴 대본으로 니나가 무대 위에서 1인극을 펼치는 유명한 장면의 대사다.
그런데 C가 대사를 자꾸 틀리자 A와 B가 지적을 하며 핀잔을 준다.
하지만 C는 아랑곳없이 연습을 계속한다. 그도 그럴 것이 C에게는 A와 B가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A와 B는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예전에 죽은 귀신이기 때문이다.
A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태어난 세대이고 전쟁이 한창이던 때 공습에 의해서 사망했다.
B는 전후세대이나 남자 문제로 고민하다가 스스로 목을 그어서 자살했다.
A의 머리에 난 상처와 B의 목에 난 상처가 화장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A와 B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C가 이들의 존재에 완전히 무감각한 것은 아니다.
C 혼자서 분장실에 있는데도 어디에선가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가 썩는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여 그녀는 종종 소름이 끼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C가 자신의 차례가 되어서 갈매기가 상연 중인 무대로 나가고 나서 얼마 후
젊은 여배우 D(유소라)가 베개를 꼭 끌어안고서 분장실에 들어선다.
D 역시 C처럼 니나의 대사를 연습하는데 C보다 나은 것 같다. 대사를 틀리지도 않고.
분장실에 돌아온 C는 D를 보고서 몸은 좀 괜찮냐며 인사를 건넨다.
D는 몸이 좋지 않아서 병원에 입원했었나 보다.
C는 D에게 잘 돌아왔다며 다시 내 프롬프터(무대 뒤에서 배우의 대사를 읽어주는 사람)를 해 달라고 부탁하지만
D는 이를 거절하며 내가 돌아왔으니 니나 역을 내놓으라며 도리어 C를 압박한다.
니나보다는 아르까지나(니나의 연인인 꼬스챠의 엄마)가 보다 어울릴 것 같은 연령이 된 C로서는
젊고 싱싱한 D가 지지 않을 기세로 달려드니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C가 손에 잡히는 물건을 들어서는 D의 머리를 내리치자 그대로 쓰러져 버린다.
얼마 후 다시 정신을 차린 D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C를 뒤로하고 분장실을 나가 버린다.
거울 앞에 서서 예전의 생기 넘치던 때와는 달라진 자신의 몸매를 바라보던 C가 퇴장하자
베개를 껴안은 D가 다시 등장한다.
여전히 화장대 앞에 앉아서 분장을 하고 있는 A와 B에게 D가 다가오더니 인사를 건넨다.

시미즈 쿠니오는 어느 공연장 분장실의 벽에서 마치 다리미로 지진 듯
검게 그을린 자국을 보고서 희곡 분장실을 쓰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벽에 생긴 검은 자국은 아직 제대로 된 배역을 맡아보지 못한 배우가
잘나가는 다른 배우를 질투하고 저주하는 마음이 쌓여서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력에
금남의 구역인 여배우들의 분장실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궁금증이 더해진 것이리라.
여자는 남자보다 질투와 시기가 심한 걸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여배우들이다. 무대에 서고 싶고 대중 앞에 나서고 싶은 여배우들에게 있어서
그녀들끼리의 경쟁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무대에 서기 위해서 더 나은 배역을 따내기 위해서
혹시 남자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중상모략과 뒷공작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예쁜 얼굴의 여배우들이 동료를 헐뜯고 양심을 속이는 그런 못된 짓을 할 거라고는 솔직히 상상하고 싶지 않다.
연극 분장실의 작품 속에는 네 명의 여배우가 등장한다.
배경이 공연장의 무대 뒤 분장실로 설정되어 있으므로 배우들의 대사 연습이 필히 등장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 연극에는 안톤 체홉의 갈매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미요시 쥬로(三好十郎)의 잘리는 남자 센타(斬られの仙太), 안톤 체홉의 세자매의 대사 중 일부가 등장한다.
이들 네 희곡에서 인용한 대사가 분장실 전체 대사의 25퍼센트 정도나 되니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이다.
치쿠마쇼보(筑摩書房)에서 간행하는 PR잡지 치쿠마(ちくま) 1987년 5월호에 실린
시미즈 쿠니오의 에세이 나의 바이블(わが“バイブル”)에 의하면 작가는 희곡을 쓰다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안톤 체홉의 단막극 중 곰(熊), 청혼(結婚申しこみ), 백조의 노래(白鳥の歌)를 읽으며
다시 글을 쓰는 힘을 얻는다고 밝힌 바 있다.
곰에는 남녀관계, 청혼에는 개개인의 관점의 차이, 백조의 노래에는 나이를 먹으며 입장이 뒤바뀌는 관계가
잘 나와 있어서 체홉이 사용한 패턴을 그대로 모방해서 글을 써도 전혀 어색하거나 모방한 티가 나지 않는다며
그는 체홉의 작품들이 시대를 뛰어넘어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관계의 특징을 얼마나 잘 포착하고 있는가를 칭찬했다.
분장실에서는 체홉을 비롯한 선배 작가들이 쓴 작품 속 대사를 그대로 인용하여 사용하고 있으니
교활하다고 할까 영리하다고 할까 여하튼 작가가 이미 알려진 작품들을 재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은 분명하다.


여배우 B 역의 홍부향 배우.

여배우 A 역의 도유정 배우와 C 역의 김은영 배우.
개인적으론 도유정 배우에게 특히 눈길이 갔다. 키도 크고 외모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이미지가
최근 시트콤 너의 등짝에 스매싱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황우슬혜 배우와 비슷하여 더욱 인상에 남는다.
더 많은 작품에서 만나보고 싶다.
연극 분장실은 네 명의 여배우 주인공들을 통하여 여배우들의 연극에 대한 집념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무대에 서고 싶다는 집념이 얼마나 강했으면 분장실의 지박령이 되었을까 측은지심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갈매기와 세자매를 익히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작품 속에 이들 희곡의 대사가 등장하니 반가움이 더해진다.
무엇보다도 여배우만 네 명이 출연하기에 여배우들이 제각각의 매력을 발산하고 경쟁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
여배우들만 출연하므로 보다 남성관객들의 취향을 저격할 수 있는 작품으로 각색도 가능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연극 분장실 커튼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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