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의 첫 번째 토요일 오후에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연극 14인 체홉을 관람했다.

공연장 로비의 온풍기 앞에 강아지가 한 마리 있기에 찍어 보았다.

연극 14인 체홉의 초연은 2013년 6월에 있었다.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를 개발한 우란문화재단에서 극단 맨씨어터와 공동으로 제작했고
초연 때에는 안톤 체홉의 단편소설 중 다섯 작품
백조의 노래, 담배의 해로움에 관하여, 청혼, 곰, 불행을 희곡화하여 무대에 올렸다.
극단 맨씨어터 창단 10주년을 맞이하여 맨씨어터에서 제작하고 우현주 대표가 연출을 맡은
이번 공연에서는 두 개의 단편이 빠지고 한 개의 단편이 추가되어
담배의 해로움에 관하여, 청혼, 곰,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이 연극으로 관객을 찾아온다.
스케줄을 보면 네 작품이 모두 무대에 오르는 날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이 중 세 개의 작품이 번갈아가면서 무대에 선다.

이날 공연의 캐스팅은
청혼 편 권지숙, 이창훈, 이은,
곰 편 최덕문, 서정연, 구도균,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편 박기덕, 하현지, 오범석, 우현주(내레이션) 배우였다.
공연시간은 110분이었다.
네 편의 단막극이 모두 상연되는 경우라면 이보다 30여 분 정도 늘어날 거라 예상한다.

이창훈, 권지숙, 이은 배우.
스쩨빤 스쩨빠노비치 추부꼬프는 대지주다. 그에겐 혼기를 놓친 과년한 딸 나딸리야 스쩨빠노브나가 있다.
어느 날 이웃에 사는 젊지만 매우 심약한 청년 지주 이반 바실리예비치 로모프가 스쩨빤 저택을 찾아온다.
이반이 스쩨빤을 찾아온 이유는 나딸리야에게 청혼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반은 건강이 무척 좋지 않다. 건강이 더 악화되기 전에 결혼이라는 걸 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냥 얼굴만 알고 지낼 뿐 교제하고 있지도 않은 나딸리야에게 청혼을 하러 온 것이다.
스쩨빤은 딸을 부른 후 자리를 피해준다.
아버지의 부름에 응접실에 모습을 나타낸 나딸리야는 이반과 이런저런 근황을 이야기하다가
토지 소유권과 관련된 대화에서 말다툼을 벌이고 만다.
이반이 스쩨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 중 일부가 자신의 할아버지가 무상으로 빌려줬던 것이라고 주장하자
나딸리야가 그런 적 없다며 발끈한 것이다.
화가 난 이반이 돌아가고 나서야 다시 모습을 드러낸 스쩨빤이 이반이 방문했던 목적을 딸에게 이야기해주자
나딸리야는 왜 그걸 이제서야 말하냐고 노발대발하니 스쩨빤이 뛰쳐나가서 이반을 다시 데리고 온다.
그러나 이반과 나딸리야의 말싸움은 또다시 시작되고 만다.
권지숙 배우가 스쩨빤 역으로 남장을 하고 출연했고
이반 역 이창훈 배우와 나딸리야 역 이은 배우는 의도적으로 과장된 몸짓과 말투로 연기를 하여
이 단막극이 코미디임을 계속하여 어필했다. 다소 작위적인 느낌이 없진 않았으나
체홉의 작품이 결코 지루하거나 무겁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체홉의 작품에 관하여 잘못된 편견을 갖고 있는 관객에게는 파격적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구도균, 최덕문, 서정연 배우.
이날 세 편의 단막극 중 곰이 가장 재미있었다.
보조개가 있는 젊은 과부 옐레나 이바노브나 뽀뽀바는 남편이 죽은 후 상복을 입은 채 정절을 지키고 있다.
옐레나가 1년이 지나도록 집밖에 나가지 않는 이유도 그런 연유에서다.
지루한 일상이 계속되던 어느 날 죽은 남편에게 빌려준 돈을 받으러 온 손님이 있다는
하인 루까의 보고를 받은 옐레나는 손님을 거실에서 맞이했다.
응접실에 들어선 곰처럼 건장한 체격의 지주 그리고리 스쩨빠노비치 스미르노프는 성급하게 말을 꺼냈다.
내일까지 은행에 빌린 돈을 갚지 않으면 목을 매야 할 처지이므로 오늘 중으로 돈을 갚으라는 내용이었다.
옐레나는 수중에 그런 큰돈이 없으니 모레까지 기다려 달라고 그리고리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러나 그리고리는 막무가내였다.
오늘 중으로 돈을 받아가야 하겠으니 돈을 줄 때까지 이곳에 머물겠다며 바닥에 드러눕기까지 했다.
곰 같은 남자의 야만적인 행동에 화가 난 옐레나는 남자에게 결투를 신청하고는 권총을 꺼내어 온다.
최덕문 배우가 거실 바닥에 드러눕는 장면에서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서는
한 손으로 공중에서 휘리릭 돌리면서 옷이 팔뚝에 감기게 하여
즉석에서 머리에 베고 누울 베개로 만들어 버리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터프한 남성미를 연속되는 몸동작으로 함축하여 표현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옐레나 역 서정연 배우의 매력이 돋보이는 무대이기도 했다.
정숙한 몸가짐을 유지하다가도 발끈할 때 보여주는 깜찍한 표정연기라든가
그리고리를 상대하면서 옐레나가 서서히 야수처럼 변해가는 과정을 재미있게 잘 살려냈다.
최근 드라마를 잘 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서정연 배우는 지난 여름에 종영한 품위있는 그녀라는 드라마에서 열연했다고 하니 몰아서 시청해볼 생각이다.
이날 객석에는 송유현 배우가 있었다. 내 바로 옆자리였고 공연장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녀인지 알아봤다.
마침 내 좌석의 열이 송유현 배우 일행과 나뿐이라서 일부러 그녀와 한 자리 띄우고 앉았다.
나야 예쁜 여배우님 바로 옆에 앉으면 좋지만
모르는 일반인이 옆에 앉으면 아무래도 불편할 수 있으니까 필자 나름의 배려였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송유현 배우는 다른 관객들이 모두 퇴장할 때까지 객석에 남아 있었다.
함께 사진 찍고 싶다는 말이 끝내 입밖으로 나오지 않아서
추억으로 남을 수도 있었던 사진은 시간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공연 후 포토타임처럼 공적으로 허락된 시간과 달리
사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배우님에게 사진을 같이 찍자거나 사인을 해 달라고 요청하기가 참 쉽지 않다.
숫기가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사적인 시간을 방해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역시 후회되는 것이 사실이다. 여하튼 숫기가 없으면 이래저래 손해가 많다.
웹에서 기사를 검색해 보니 아마도 이날 최덕문 배우를 보려고 공연 나들이를 하지 않았나 싶다.
그녀는 구도균 배우가 연기하는 루까를 그리고리가 윽박지르는 장면에서 까르르 웃으며 특히 재미있어했다.
송유현 배우는 일일드라마 미워도 사랑해에 출연 중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녀를 처음 보았던 것이 연극 게이결혼식(웨딩스캔들)을 통해서였던 만큼 연극무대에서도 또 만나보고 싶다.

박기덕, 하현지, 오범석 배우.
올해 공연에서 새롭게 추가된 단막극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앞의 두 작품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청혼과 곰이 가벼운 느낌의 희극이었던 것에 반하여 이 작품은 우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데다가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스피커로 목소리 출연만 하는
우현주 배우의 내레이션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서 낭독극의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수많은 여자와 바람을 피웠던 중년의 은행원 드미트리 드미트리치 구로프가
속칭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이라고 불리는 안나 세르게예브나라는 여인과 불륜에 빠지면서
이제껏 경험한 적 없었던 진실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된다는 내용의 작품이었다.
무대 우측에 설치된 전신거울 크기의 스크린에 다양한 그림을 비추어
객석에 흐르는 낭독 음성에 시각적인 효과를 더하려는 시도가 눈길을 끌었다.
체홉의 대표작 갈매기, 세자매 등의 연극을 접하면서
체홉의 단편소설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체홉의 희곡 수는 16편으로 생각보다 많지 않지만 단편소설은 400편이 넘는다고 하니
체홉의 소설을 희곡화한 연극 14인 체홉과 같은 시도는
체홉을 알리고 그의 작품을 즐기기 위한 바람직한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연극 14인 체홉 커튼콜.
예매사이트에 커튼콜을 포함하여 사진 촬영 불가라고 공지되어 있었으나
공연 시작 전 안내방송에서 커튼콜 촬영이 가능하다고 알려주었다.
이날 이 공연만 관람할 예정이었다면 카메라를 챙겨 가지 않았겠으나
커튼콜 촬영이 가능한 다른 공연도 관람하러 갔기에 카메라를 챙겨 갔었다.
모든 배우가 무대 앞에 정렬한 상황에서 서정연 배우가 인사 타이밍을 착각해서
까르르 웃으면서 겸연쩍은 표정을 감추려고 한 바퀴 턴을 하는 임기응변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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