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상청 예보보다 훨씬 많은 비가 내렸던 지난 토요일에
나루아트센터 대공연장에서 연극 비명자들2를 관람했다.

연극 비명자들2는 극단 고래의 이해성 대표가 작, 연출을 맡았고 총 3부작으로 제작될 예정이다.
비명자들2의 프리퀄(전편)에 해당하는 비명자들1은 내년에,
시퀄(후편)에 해당하는 비명자들3는 내후년에 무대에 오를 전망이다.
연극무대에서 3부작이라는 구성도 참신하고
시간 순서상 중간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먼저 공개했다는 점도 신선했다.
연극 비명자들2의 공연시간은 인터미션 없이 2시간 10분이다.
3부작이 모두 완성된다면 인터미션 포함 약 7시간의 대작이 될 거라 생각한다.

연극 비명자들2는 한마디로 영화 같은 연극이었다.
몇 년 전 티베트의 어느 마을에서 일어났던 사건으로 연극은 막을 올린다.
비명자들을 연구하기 위해 이곳까지 온 파사현정연구소 소속의 보현 앞에
결박된 티베트인들이 무릎을 꿇고 있고 중국 공산당 간부가 그들을 윽박지르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비명자들이 속출하여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되어 있다.
비명자란 고통 속에서 이성을 상실한 채 비명만을 질러대는 사람을 가리킨다.
비명자가 질러대는 비명 소리는 반경 4km 이내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한다.
게다가 비명자에게 물리적 충격을 가하게 되면 반경 4km 이내의 사람들에게 똑같은 충격이 전달된다.
비명소리를 참다 못해 비명자에게 총을 쏘았다가 반경 내의 수백 명이 죽는 사고도 일어났다.
비명자의 비명을 멈추게 하기 위해선 현재로서는 파사(破邪)만이 유일한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파사란 비명자의 목을 잡고서 목뼈를 부러뜨려 죽이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파사의 경우에는 반경 내의 사람들에게
비명자에게 가해진 충격이 반사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파사하기 위해서 비명자와 신체접촉을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비명자의 비명소리에 의한 고통보다 몇 십, 몇 백 배는 더 강렬한 고통이 파사자를 엄습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정신줄을 놓아버린 비명자의 그 고통이 파사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이다.
보현은 비명자들을 파사하지 않을 것이고 단지 격리해 놓기만 할 것이라고 티베트인들을 설득하였으나
아무리 비명자가 되었다고는 해도 형제와 가족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없다며
결박당한 티베트인들은 끝내 협조를 거부했고 공산당 간부는 그들의 머리를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이야기는 현재로 돌아온다.
한국에서도 비명자가 속출하자 정부는 파사현정(破邪顯正) 연구소라는 민간연구소를 설립한다.
파사현정이란 사악한 생각을 버리고 올바른 도리를 따른다는 의미의 불교용어다.
파사현정 연구소에서는 비명자를 연구하는 한편 비명자의 파사를 담당했다.
현재 비명자를 파사할 수 있는 직원은 박요한 파사팀장이 유일하다.
그는 통각이 마비되어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무통증이다.
그러나 요한은 무통증임에도 파사할 때마다 마음과 정신이 피폐해져간다.
비명자의 신체에 접촉하는 순간 비명자를 고통스럽게 만든
비명자의 과거가 요한의 뇌리에 그대로 재생되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요한이지만 마음에 느껴지는 고통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보현의 티베트 사건이 전개된 도입부는 아마도 비명자들1의 결말부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이 장면에서 사실주의를 살리기 위하여 보현을 제외한 배우들은 중국어와 티베트어를 사용한다.
중국어와 티베트어에 한국어까지 가능한 걸로 설정된 통역사 역의 배우가 한국어로 통역을 하기는 하지만
배우들의 대사가 통역사를 거쳐서 중개되다 보니 아무래도 극의 전개가 답답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이해성 연출의 인터뷰 기사를 보니 극단 고래의 공연에는 귀신이 반드시 등장한다고 한다.
비명자들에서는 비명자가 귀신에 해당한다.
그래서 비명자 역 배우들의 의상은 귀신을 연상시키는 하얀색으로 되어 있다.
게대가 관객 출입문을 통하여 객석 통로에서 출몰하는 비명자도 있어서
통로 쪽에 앉은 관객은 하얀 옷을 입고서 옆을 스쳐 지나가는 비명자로 인하여 흠칫 놀랄 수도 있을 것이다.

남명렬 배우는 파사현정 연구소의 소장 무진장 역으로 출연한다.
이송이 배우는 파사현정 연구소의 현정팀장 문수진 역으로 출연한다.
무진장 소장은 대원들에게 네 가지 고귀한 원리인 사성제를 수련시킨다.
사성제(四聖諦)란 불교용어로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네 가지 진리 고(苦)제, 집(集)제, 멸(滅)제, 도(道)제를 가리킨다.
고제란 현실세계의 결과. 즉 인생은 그 자체가 고통이다.
집제란 현실세게의 원인. 즉 고통을 야기한 원인이 있다.
멸제란 이상세계의 결과. 즉 고통은 완전히 소멸될 수 있다.
도제란 이상세계의 원인. 즉 고통을 소멸하는 방법이 있다.
이러한 의미를 담은 고집멸도라는 사자성어는 파사팀 대원들의 구호이기도 하다.
비명자가 내지르는 비명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서 파사팀 대원들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고집멸도를 읊조리며 정신수양을 함으로써 비명자에게 전염된 고통의 해독과정을 거친다.

보현 역 박윤정 배우, 요한 역 박완규 배우, 세은 역 김혜진 배우.
주인공 박요한은 파사 임무를 계속 수행한다. 무통증인 그 외에는 파사를 수행할 수 있는 다른 인력도 없었다.
파사팀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신문기자 세은은
아무리 의식이 없는 상태이고 비명으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 생체반응을 하고 있는 비명자를 파사하는 요한을 향하여 살인자라고 손가락질한다.
요한이 파사를 수행하며 겪게 되는 고통을 관객들은 알고 있으므로
아무것도 모른 채 주인공을 살인자로 몰아세우는 세은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보현은 티베트에서 학살 현장을 목격한 후 그 충격으로 정신병원에서 요양을 하게 되지만
결국에는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비명자가 되어 버린다.
함께 일했던 동료를 파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요한의 번민과 갈등은 한계점에 다다르게 된다.
무려 33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연극 비명자들2는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흥미진진한 작품이었다.
이해성 연출은 이 연극에서 영화적 서사를 실험해보고 싶었다고 밝혔는데 영화적 서사는 성공적이었다.
요한이 파사를 위해서 비명자의 목을 잡는 장면에서는 각각의 비명자의 고통스러운 사연이 알려진다.
비명자의 연기로 고통의 원인을 알리는 대목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미리 제작해 놓은 비명자 역 배우의 내레이션 영상을 프로젝터로 무대 뒷면에 송출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생활고, 학교폭력, 페리호 침몰 등 뉴스에서 접했던 많은 사회적 문제가 고통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었다.
연극 비명자들2는 영화적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공연이었고
비명자를 만들어내는 현대사회의 문제점과 해결방법을 함께 생각해보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연극이기도 했다.
연극 비명자들2 커튼콜.
이날 공연의 출연배우는
남명렬, 강애심, 김성일, 김동완, 박완규, 박윤정, 김지현, 변신영, 최지숙,
이현정, 허지행, 신장환, 이송이, 이요셉, 안영주, 이명신, 이사랑, 임다은, 양이배, 김혜진, 한아름,
문종철, 김태양, 임미나, 오한나, 박현민, 김지훈, 정다정, 최수정, 한상욱, 사현명, 송하늘, 오세훈 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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