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창한 봄날을 만끽할 수 있는 5월이다.
대학로에선 제38회 서울연극제가 한창이다.

마로니에 공원 인근에선 거리공연이 행해지고 있었다.
언제나 생기가 넘치는 거리 연극의 메카 대학로다.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연극 옆방에서 혹은 바이브레이터 플레이를 관람했다.
미국의 여성 극작가 사라 룰(Sarah Ruhl)이 쓴 동명희곡 In the Next Room(or The Vibrator Play)는
2009년에 미국에서 초연이 있었고 이번 공연이 국내 및 아시아 초연이다.
극단 행길이 제작했고 이 극단의 대표 최재오 교수의 아내 이강임 교수가 번역 및 연출을 맡았다.
제목에 등장하는 바이브레이터(Vibrator)는 사전적 의미로는 진동기 또는 전동 마사지기라는 뜻이지만
현실에서는 진동 기능이 있는 여성용 자위기구를 의미하는 단어로 주로 사용된다.
공연장 로비에는 바이브레이터의 역사를 소개하는 사진과 글이 전시되어 있었다.
히스테리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자궁의 병이라는 뜻이다.
히스테리 치료법으로는 여성의 뭉친 자궁을 풀어내서
패록시즘(오르가즘을 표현하던 당시의 의학용어) 효과를 내는 외음부 마사지가 각광받았는데
이 마사지는 그리스 시대부터 발전을 거듭하여 빅토리아 시대까지 이어졌다.
전기 바이브레이터는 1883년 영국 의사 모티머 그랜빌(Mortimer Granville)이 발명했다.
이로써 그동안 손으로 오랜 시간 마사지를 해야 했던 의사들은 힘든 노동에서 해방되었다.
바이브레이터는 손으로 하는 마사지보다 빠르고 확실하게 패록시즘 효과를 가져오며 혁신적인 의료기기로 부상했다.
* 바이브레이터 발명가인 그랜빌의 일대기를 그린 히스테리아(Hysteria. 2011)라는 영화가 있다.

연극 옆방에서 혹은 바이브레이터 플레이의 공연시간은 1부 60분, 인터미션 10분, 2부 85분으로 구성되었고
유지수, 최진석, 김나미, 진남수, 송영숙, 이은지, 김동곤 일곱 명의 배우가 출연한다.
이 연극은 유쾌한 섹스 코미디였다.
배우의 직접적인 노출이나 노골적인 선정적 장면은 없으나
주된 소재가 패록시즘, 오늘날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오르가즘과 관련이 있기 때문인지 18세 이상 관람가로 설정되었다.

좌로부터 던들리 부인 역 김나미, 애니 역 송영숙, 기빙스 박사 역 최진석,
기빙스 부인 역 유지수, 던들리 역 진남수, 엘리자베스 역 이은지, 레오 역 김동곤 배우.
기빙스 박사는 작품 속에서 바이브레이터를 발명한 의사로 설정되어 있다.
그의 자택 내부에 진찰실을 설치하였으나 진찰실에 아내가 출입하는 것은 금하고 있다.
기빙스 부인은 얼마 전 아이를 출산하였으나 젖이 잘 나오지 않아서 유모를 원하고 있다.
남편이 진찰실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조금은 불만이다.
남편은 진찰을 받으러 집에 방문하는 환자들과 마주치는 것도 금하고 있지만
활달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그녀는 환자들과도 금방 친해진다.
덜드리 부인은 기빙스 박사를 찾아온 여자환자다.
그녀는 사람 만나는 것도 싫고 전등불빛만 봐도 신경질적이 되고 매사가 우울한 히스테리 환자이지만
바이브레이터 치료를 받으면서 혈색도 되살아나고 성격도 활기를 되찾게 된다.
덜드리는 나이차가 나는 어린 아내의 히스테리를 치료하기 위해 기빙스 박사의 저택을 부부가 함께 방문한다.
아내가 진료실에서 진찰을 받는 동안 거실을 서성이다가 기빙스 부인과 대면하게 되고
부인의 권유로 함께 집 밖 정원을 산책하다가 소나기를 만난다.
애니는 십수 년간 기빙스 박사 밑에서 일한 능숙한 조수이고 미혼이다.
박사보다 조수 애니의 마사지 실력과 바이브레이터 다루는 기술이 낫다고 말하는 환자들도 있다.
엘리자베스는 덜드리 저택에서 일하던 흑인 하녀이고 두 아이의 엄마이고 얼마전 셋째인 갓난아이를 잃었다.
유모를 구한다는 기빙스 부인의 말에 덜드리 부부는 엘리자베스를 추천한다.
레오는 이태리에서 예술활동을 하다가 귀국한 후 슬럼프에 빠져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자 기빙스 박사를 찾아왔다.
바이브레이터 치료를 받고서 상태가 호전되자 수유하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보고서 예술적 영감을 떠올린다.

연극 옆방에서 혹은 바이브레이터 플레이는
영국의 근대 전성기를 이끌었던 빅토리아 여왕이 재위했던 64년간의 기간을 가리키는
빅토리아 시대 후반기인 188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빅토리아 시대라는 설정답게 상류층 여성의 복고풍 의상이 시각적으로는 무척 매력적이다.
그러나 던들리 부인이 진료실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의상을 탈의하는 장면에서
코르셋을 포함하여 몇 겹의 옷을 벗는 수고스러운 동작을 지켜보면서
저 시대에는 여인들이 아름답게 치장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불편을 겪어야 했나를 실감하게 된다.
이 연극은 페미니즘을 저변에 깔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코르셋처럼 여성을 옥죄고 있던 구시대의 폐습을 이렇듯 작품 곳곳에서 고발하고 있다.
던들리 부인이 남편에게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패록시즘을
기빙스 의사의 진찰실에서 전기를 이용한 바이브레이터 기계에 의해서
처음으로 느끼면서 거칠고 높은 음색으로 내뱉는 신음소리는 억눌렸던 여성의 해방을 상징하고 있었다.

기빙스 부인은 남편이 의사 일에만 열심이고 부부관계에는 소홀하여 불만이다.
환자들을 진찰할 때 쏟는 정성만큼 자신에게도 애정을 보여주면 좋을 텐데 말이다.
문이 잠긴 진찰실 안에서 여자환자가 미친 듯이 내지르는 신음소리 또한 그녀를 불안하게 만든다.
대체 진찰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저 여자는 저렇게 숨 넘어갈 듯이 소리를 지르는 걸까.
그러나 진찰을 마치고 나오는 여자환자는 혈색도 좋아졌고 기분도 한결 나아진 듯 보이니
기빙스 부인의 궁금증은 커져만 간다.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아내를 따라 기빙스 의사의 집에 왔던 던들리는 의사의 아내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예술을 하는 남자환자 레오는 예술의 영감을 불어넣어준 유모 엘리자베스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외로운 기빙스 부인은 소홀하고 차가운 남편과 달리 열정이 넘치는 화가 레오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등장인물들간의 엇갈린 큐피드의 화살 또한 작품에 재미와 활기를 더해준다.
연극 옆방에서 혹은 바이브레이터 플레이는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고
이야기 자체도 무척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작품이었다.
몇 겹으로 껴입어야 하는 갑갑한 의상처럼 성욕에 있어서도 자유롭지 못한 시대를 살았던 여성들이
바이브레이터에 의해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을 깨달으며 보다 밝고 즐겁게 변해가는 이야기,
잊고 있었던 사랑의 감정을 싹틔우며 가슴 설레하는 어른들의 풋풋하고 싱그러운 이야기,
그리고 거실의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춤도 추고 걸즈토크도 즐기는 부인들의 이야기 등
다양한 에피소드가 맞물려 제목의 바이브레이터처럼 관객을 흥분시키는 매력 넘치는 연극이었다.
연극 옆방에서 혹은 바이브레이터 플레이 커튼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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