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 & 旅行 남한산성(南漢山城) 등산 後편 2012/10/21 16:27 by 오오카미


오후 2시 15분.
종로의 중심이라 생각되는 산성로터리(남문안로터리)에서 동문을 향하여 이동했다.
로터리에서 동문까지의 거리는 800m이다.
동문에 닿기까지 몇 개의 유적이 등장했는데 가장 먼저 출현한 것은 연무관이었다.
연무관(演武館)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호.
연무관은 군사들의 훈련을 위하여 건립한 곳으로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연무당이라 부르던 것을 숙종 때 수어사 김좌명으로 하여금 다시 짓게 하고 연병관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정조 때에는 수어영이라 개칭하였으나 그 뒤에도 통칭 연병관 또는 연무관이라 부르고 있다.
연무관 규모는 약 300㎡로 규모가 크고 육중하며 높은 기단 위에 자리잡고 있어 멀리서도 그 자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건물 내부 가운데 있는 대들보에는 전, 후면에 용을 그렸고 측면쪽 대들보에는 봉황을 그려 넣은 것이 특이하다.

다음으로 등장한 것은 해공 신익희 선생 동상이었다.
신익희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중의 한 사람이고 경기도 광주 출신의 정치인이다.
남한산성의 성곽은 경기도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있으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행궁과 종로가 행정구역상 광주시에 속해 있다.
다음으로 등장한 것은 현절사였다. 
로터리에서 동서남북으로 뻗어있는 남한산성의 메인 도로라 할 수 있는
남한산성로로부터 200m쯤 북동쪽으로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현절사(顯節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호.
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했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삼학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부속 건물을 합하여 3동으로 구성되었는데 단아하고 소박한 인상을 주어 조선의 선비 정신을 말해주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병자호란 때 조정은 청나라와 화의를 주장하는 주화파와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파가 대립하였는데
결국 주화파의 의견대로 화의가 이루어져 인조는 삼전도에서 항복하였다.
청나라는 끝까지 전쟁을 주장한 조선의 대신들을 볼모로 데려갔다.
삼학사는 당시 청나라에 끌려간 대신들 중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참형을 당한 사람들이다.
사당은 이들이 처형된 지 50년 만인 숙종 14년(1688)에 유수 이세백의 주도로 세워졌으며
숙종 19년에 왕은 현절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숙종 25년에는 삼학사와 함께 항복하기를 거부한 김상헌, 정온의 위패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앞서 숭렬전과 마찬가지로 현절사도 출입은 금지되어 있었다.
나는 동문을 거쳐서 동장대터로 향할 생각이었으므로 다시 남한산성로로 내려갔으나
숭렬전 부근의 이정표에는 동장대터까지 800m, 벌봉까지 1.4km 거리라고 쓰여 있었으니 
동문을 거치지 않고 숭렬전에서 바로 동장대터로 향하는 산길도 있는 듯했다. 
메인 스트리트로 내려와 다시 동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로 우측으로 근사한 2개의 연못이 나란히 모습을 나타냈다.
지수당(池水堂)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호.
지수당은 현종 13년(1672)에 부윤 이세화가 건립한 정자로
건립 당시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앞뒤에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 남아 있다.
정자의 동쪽에는 부윤 이세화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고 제3연못지로 추정되는 지역은 현재 논으로 바뀌어 있다.
정자의 남쪽에는 서에서 동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정자 옆의 연못은 ㄷ자형으로 파서 연못이 정자를 둘러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으나
을축년 대홍수 때 매몰된 것을 근래에 고증을 통하여 복원한 것이다.

연못에 둘러싸인 정자에 앉아 시원한 바람과 고즈넉한 자연을 만끽하며 
풍류를 즐겼을 선비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푸르른 가을 하늘은
바람 부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보라고 유혹한다.
오후 2시 45분.
동문 앞에 다다랐다.
장경사와 망월사 두 개의 사찰도 부근에 있는가 보다.
서문, 북문과 달리 동문은 대문을 통과해볼 수도 없었고 문루에 올라가볼 수도 없었다.
동문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는 문 자체에 접근을 금하고 있었다.
좌익문(동문)
남한산성에는 동, 서, 남, 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동문은 성의 남동쪽에 위치하여 남문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했던 성문이다.
조선 선조 때 보수하였고 인조 2년(1624)에 다시 건립하였으며 정조 3년(1779) 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하였다.
이 때 성문마다 이름이 하나씩 붙여졌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門)이라 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동문이 좌측이 되므로 좌익문이라 한 것이다.
이 동문은 낮은 지대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축조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문 안쪽에서 여장을 따라 길을 오르다가 도로 내려왔다.
동문 바깥쪽에서 동문과 성벽을 올려다보면 멋진 그림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동문은 낮은 곳에 위치한 만큼 성 바깥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급경사를 이루며 위로 치솟는 성벽과 어우러져 근사한 피사체가 되어 주었다.
동문 바깥에는 이곳이 남한산성임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남한산성 동문은 산성에서 가장 낮은 높이인 해발 297m에 위치하고 있다.
그렇기에 동문에서 해발 501m인 동장대터까지 연결되는 성벽은 경사가 가팔랐다.
곳곳에서 가을에 붉게 물들어가는 단풍을 엿볼 수 있었다.
송암정터
송암정은 우리말의 솔바위 정자라는 뜻이다.
옛날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 하산하여 이곳을 지나는데 남자 여럿이 기생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중 술에 취한 한 사내가 황진이를 희롱하려 하자 황진이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불법을 설파하였다.
이 때 그 무리 중 감명을 받은 기생 한 사람이 갑자기 절벽으로 뛰어내려 자결하였는데
그 후 달 밝은 밤에는 이곳에서 노래 소리와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이 바위에 서 있는 고사목(소나무)은 정조가 여주 능행길에 대부 벼슬을 내려 대부송이라 부르는 소나무이다.

길을 오르다 송암정이라는 고사목에 얽힌 전설을 접할 수 있었다.
기생의 대명사 황진이가 불법을 설파했다는 것이 미덥지 않았으나
님을 그리워하며 전국을 떠돌았다고 전해지는 그녀이니 남한산에 올랐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확실히 평지보다는 높낮이의 차가 있는 곳의 성벽이 더욱 근사해 보인다.
외국인들의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다.
옥개석(여장의 지붕)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귀여운 곤충의 대명사이자 익충으로 잘 알려진 무당벌레도 만나볼 수 있었다.
산허리를 감싸며 굽이치는 성벽의 모습은 감미로웠다.
오후 3시 10분.
다음으로 들른 곳은 장경사다.
성곽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이므로 동문에서 동장대터까지 여장을 따라 걷다보면 놓치지 않고 들를 수 있다.

장경사(長慶寺)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호.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고쳐 쌓을 때
승려 벽암각성을 팔도 도총섭으로 삼고 전국의 승려들을 번갈아 징집하여 성을 쌓게 하였다.
축성 후에도 승군을 주둔시켰는데 이들의 숙식을 위하여 인조 16년에 건립한 절이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승군제도가 없어질 때까지 전국에서 뽑힌 270여 명의
승려가 교대로 산성을 보수하거나 경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산성 내에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10개의 절이 세워졌는데 장경사가 창건 당시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사찰 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진남루, 칠성각, 대방, 요사채 등이 있었는데
그 중 대웅전이 가장 화려한 양식을 가지고 있다.

장경사에서 바라본 남한산성 성벽의 모습.
색을 바꾸며 서서히 물들어가는 단풍의 모습이 신비롭다.  
구간에 따라서는 계단식과 비계단식의 길이 혼재하고 있으므로 취향에 따라 골라 걸을 수 있다.
오후 3시 25분.
다음으로 등장한 것은 장경사신지옹성이었다.

장경사신지옹성(長慶寺信地甕城).
옹성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
장경사신지옹성은 한봉성과 봉암성에 대한 방어를 주목적으로 설치되었으며 둘레가 159m이다.
옹성 끝에는 2개소의 포대가 설치되었고 포루의 좌측 벽에는 이방이라 불리는 무기나 화약을 저장하는 시설이 있었다.
본성과 연결되는 지점에는 전투 시에 성내로 출입할 수 있도록 암문을 설치하였다.

장경사신지옹성은 동문으로부터 1.1km, 동장대터로부터 400m, 북문으로부터 1.8km 떨어진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본성과 옹성은 제2암문을 통하여 연결되어 있었다.
제2암문(장경사신지옹성 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16개의 암문이 있는데 본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설치되어 있다.
이 암문은 장경사신지옹성으로 출입하던 곳이다.
본성과 연결부에 설치된 이 암문은 폭이 1.3m, 높이가 1.42m로서 다른 암문에 비해 비교적 큰 편이다.
본성에 설치된 11개 암문 대부분이 문 밖에서 보면 문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지만
제6암문과 이 암문은 윗부분이 ㅡ자로 만든 평거식문이다.
또한 다른 암문은 원성 축조시 함께 만들어져 계획된 것인 반면
이 암문은 장경사신지옹성을 쌓으면서 신축한 암문으로 보인다.

제2암문을 통하여 본성 밖으로 나가보니 옹성 내부에는 발 디딛을 틈이 없을 정도로
수풀이 무성하여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장경사신지옹성에서 동장대터로 향하는 구간은
길다란 성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어서 경치가 특히 좋았다.
단풍이 더욱 붉게 물들어 가을의 향취가 그윽할 즈음에는
고운 단풍과 길게 꼬리를 늘어뜨린 성곽이 잘 어울려 한층 빼어난 경관을 연출할 것 같다.
오후 3시 40분.
동장대터에 올랐다. 터를 한자로 표현하여 동장대지(東將臺址)라고도 한다.
장대란 전쟁 또는 군사훈련 때 성내의 군사들을 지휘하기 위하여 대장이 자리하는 건물이다.
남한산성에 남아있는 장대는 수어장대가 유일하고 나머지는 장대가 있었던 터였음을 알리는 비석만이 서 있다.
동장대터는 해발 501m로 본성 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동장대터가 위치한 곳의 여장은 보수하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서 
수백 년 세월의 풍상을 거쳐온 남한산성의 모습을 느껴볼 수 있었다.

남한산성 여장(女墻) 사적 제57호.
여장이란 성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이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을 말한다.
남한산성 여장은 다른 성곽에서 보기 힘든 전돌(傳乭)로 축조한 평여장(平女墻)이다.
그러나 여장은 축조시기와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여장 재료는 일반적으로 하부는 석재로 상부는 전돌을 사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장은 수평되게 축조한 것이 기본형식이나 급경사지에서는 계단식으로,
일부 완만한 경사지에는 지형에 따라 경사지게 조성한 예도 보인다.
여장에는 중앙에 근총안 1개와 좌우에 원총안 2개 등 3개의 총안과
여장과 여장 사이에는 활을 쏘기 위한 타구(垜口)가 마련되어 있고
남한산성 여장규모는 길이 4.2m, 높이 1.3m, 폭 0.8m 내외가 일반적이다.


벽돌은 삼국시대에 제작기법이 도입되었으나 조선시대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다가
정조 20년(1796) 화성 축성 과정에서 벽돌 사용의 효용성이 입증되면서 여러 방면에서 벽돌 사용이 급증하게 되었다.
화성 축성 3년 후에 시행된 남한산성 여장 수축 공사에 벽돌이 전면적으로 사용된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기인한다.
여장 축조에 벽돌 사용이 증가하면서 더불어 수요가 급증하게 된 것이 석회다.
석회는 그 자체로는 강도가 약하지만 여기에 황토와 모래를 적당량 배합하여 굳히면 시멘트처럼 단단해지게 된다.
정조 때부터 벽돌 사용과 함께 석회 수요도 급증하게 되었다. (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의 축성기술에서)
 
보수하지 않은 여장 너머로 벌봉 방면을 바라보니 
외성의 성벽과 여장 역시 보수하지 않은 상태 그대로였다.
동장대터는 북문으로부터 1.4km, 동문으로부터 1.5km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니 북문과 동문의 중간쯤이라 하겠다.
다음 목표지인 벌봉까지는 500m 거리였다.
벌봉은 본성 바깥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벌봉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암문을 통하여 성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제3암문(봉암성 암문)
이 암문은 원성과 봉암성을 연결하는 주출입구로 다른 암문에 비해 매우 큰 편이다.
이 암문은 문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며
규모 또한 폭이 2.36m, 높이가 2.65m에 달해 문루만 없을 뿐 성문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본성을 떠나 외성으로 발길을 옮긴다.
제3암문을 지나 성 바깥으로 나온 후 우측을 돌아보니 언덕 위에 커다란 문 하나가 보였다. 
오후 3시 55분.
봉암성 입구인 제12암문을 통과하여 남한산성의 외성이라 할 수 있는 봉암성 내부에 들어섰다.

봉암성(蜂巖城).
남한산성은 단순한 하나의 성곽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이 중에서 봉암성은 본성의 동쪽인 동장대 부근에서 북동쪽의 능선을 따라 벌봉 일대를 포괄하여 쌓은 외성이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내부의 동태를 훤히 조망할 수 있는 벌봉을 청군에 빼앗겨 곤란을 겪었는데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숙종 12년(1686)에 부윤 윤지선으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였고,
숙종 31년 수어사 민진후가 포루를 증축하여 오늘에 이루고 있다.
봉암성은 남한산성의 본성에 대하여 새로 쌓은 성이므로 신성이라고도 하며,
동쪽의 성이므로 동성이라고도 하였다. 성의 길이는 2,120m이다.

봉암성의 성벽을 따라 난 길은 본성의 잘 다듬어진 길과는 많이 달랐다.
성벽과 여장은 허물어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고 길가에는 풀이 우거졌다.
한봉 갈림목이란 이름을 지닌 이정표 앞에 다다랐다.
벌봉까지 200m, 한봉까지는 1.4km 남았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오후 4시 5분.
벌봉앞 이정표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정표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을 뿐 벌봉이 어디인지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봉우리를 찾아서 이정표 부근을 배회했다.
잠시 후 커다란 바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벌봉이었다.
벌봉은 해발 512m인 남한산의 정상으로 남한산성의 본성과 외성을 통틀었을 때 가장 높은 곳이다.  
바위에 좀 더 접근해보았다.
야트마학 언덕을 오르니 벌봉 뒤편이었다.
뒤에서 바라본 벌봉은 크게 갈라진 틈이 있었고 높이는 5미터 정도 되어 보였다. 
암벽등반을 하면서까지 바위 위에 오를 생각이 없었으므로 바위를 올려다만 보고 발걸음을 돌렸으나 
집에 돌아와 남한산성 등산 후기들을 읽다보니
바위 뒤편에서 보았을 때 왼쪽에 바위 정상으로 오를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바위 옆의 길이 나뭇잎에 가려져 있어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이다. 아쉬운 일이다.

벌봉(蜂峰).
암문 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벌처럼 생겼다 하여 벌봉이라 한다.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정기가 서려 있는 벌봉을 깨트려야 산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 하여 이 바위를 깨트리고
산성을 굴복시켰다는 전설이 있다. 벌봉은 해발 512.2m로 남한산성의 수어장대(497m)보다 높기 때문에
남한산성의 서쪽 내부와 동쪽 성벽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병자호란 당시 이 지역을 청나라군에 빼앗겨
적이 성 내부의 동태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으며 화포로 성안까지 포격할 수 있었다.

벌봉 다음으론 탑공원에 들러볼 생각이었다.
남녀의 성행위를 꽤나 생생하게 묘사한 조각이 있다고 하여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벌봉에서 한봉으로 향하다가 갈림길에서 우측길을 택하여 내려가면 탑공원이었다.
포스트에 게재한 지도에는 탑공원이 있는 지역이 큰골이라고 지명이 표기되어 있으나
종로를 지나오며 획득한 지도에는 큰골 표기가 없었다.
큰골을 마크하지 못한 것이 이날 의도했던 탐방코스가 희망사항으로 전락해 버리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결국 이날의 실제 등산코스는 다음과 같았다.
서문-연주봉옹성-북문-종로-동문-장경사-동장대터-벌봉-동장대터-동문-종로-수어장대-서문
봉암성에선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고 있는 여장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남아 있는 여장도 더 이상의 파손을 막기 위해 시멘트로 대충 응급조치를 해 놓은 듯한 모양이었다.
한마디로 황폐화된 옛 성의 모습이었다.
옛 왕조의 성쇠를 아는지 모르는지 나뭇잎은 가을에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길을 헤매기 바로 전에 만난 이정표다.
한봉과 큰골이 같은 방향에 표시되어 있음에도 눈여겨보지 못했다.
큰골로 향하는 제15암문의 모습이다.
한봉 표기도 같이 되어 있었더라면 이 문을 통과했을 텐데.
지도에는 성벽을 따라가면 한봉까지 이어지기에 암문을 그냥 지나치고 성벽을 따라 계속 걸었다.
오후 4시 30분.
낯이 익은 이정표가 나타났다.
앞서 벌봉으로 향할 때 지나쳤던 한봉 갈림목이란 이름이 붙어있는 이정표였다.
큰골로 향하는 암문을 지나침으로써 한봉으로 빠지지 못하고
봉암성 성벽을 일주한 채 원위치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돌아와서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야 큰골로 향하는 암문이 바른 길이었음을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고 해서 제대로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고
무엇보다 남한산성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성곽이라서 이미 시간도 많이 늦어져 있었다.
어차피 다 돌아보기에는 시간적으로 무리가 있었기에 수어장대를 보고 하산하는 걸로 계획을 변경했다.
북문으로 향할까 동문으로 향할까 고심하다 동문으로 결정하고 다시 산을 내려갔다.
아까 올라올 때처럼 여장을 따라 내려가는 것보단 산길을 이용하여 산을 가로지르는 편이 보다 빠를 것 같았고
내려가다가 망월사에 들를 수 있으면 들러볼 겸 망월사 방향이라고 쓰여 있는 길을 택하여 동문으로 향했다.
오후 5시 10분.
동문에 도착했고 17분 후 종로의 산성로터리에 도달했다.
아쉽게도 망월사에는 들르지 못했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행궁 담장 밖의 거대한 느티나무도 가을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로터리의 이정표에 의지하여 수어장대 방향으로 향했다. 
골목 양옆으론 음식점이 즐비했다. 이 길이 과연 맞는 건가 의문이 들 무렵
어느 식당 뒤뜰을 지나니 수어장대 가는 길이라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밭길을 지나고 산길을 지나 15분 정도 산을 오르니 성곽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각은 오후 5시 50분을 지나고 있었고 해는 서산으로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성 안에서 바라보는 낙조와 붉게 물든 가을하늘은 인상적이었다.
추운 계절에는 해가 짧아진다는 것을 잊으면 곤란하다.
수어장대로 향하는 발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제6암문(서암문)
이 암문은 성벽의 흐름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북동쪽의 성벽을 돌출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원성에 설치된 12개 암문의 외측 개구부는 대부분 홍예식이지만 제2암문과 더불어 이 암문의 개구부는 평거식이다.
인조 15년(1637) 1월 23일 한밤중에 습격해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 부른다.

제6암문 부근의 이정표에는 수어장대까지 100m 남았다고 쓰여 있었다.
수어장대로 오르는 길목에는 남한산성 마을을 소개하는 커다란 알림판이 세워져 있었다.

남한산성도시.
남한산성 내부의 평지에 위치한 산성마을은 현재 관광취락으로 변해 있지만,
1626년부터 1917년까지 3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광주를 다스리는 행정중심지였다.
조선시대 관아와 마을은 보통 읍성 내에 위치하다가 비상시에는 산성으로 피난하였는데
남한산성의 경우에는 수도에서 가까운 곳에 장기전을 대비할 목적으로 관아와 마을이 함께 조성되어
축조시부터 산성 내에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남한산성도시의 구조는 도성과 읍성이 중첩된 공간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왕실공간에는 행궁, 종묘, 사적을 배치하였으며
관아공간에는 광주부의 사직, 관아, 시장 등의 기본 요소와 함께 한양 도성을 지키는 5군영 중의 하나인 수어청이 포함되었다.
그 밖에도 산성 안에는 각종 군사시설과 창고가 즐비하였다.
그러나 향교는 관아의 이전과는 별도로 구읍 인근(현재 하남시 교산동)에 잔존하였다.
관아의 이전과 때를 같이해 조정에서는 일정 규모의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원주민과는 별도로 인근 마을에서 이주민을 모집하였다.
이주민의 생계를 위해 산성 밖의 빈 땅을 지급하여 개간을 허락하였고 전세 면제와 공역 해제 등의 혜택을 부여하였다.
그 결과 1691년 이주정책이 중지될 때까지 다양한 혜택을 받기 위하여 많은 이주민들이 몰려들었다.
관아 이전 당시의 300여 가구가 50~60년이 지난 숙종 연간에는 600여 가구에 2,4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1917년 광주군청이 경안으로 이전되면서 도시의 해체는 형성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2010년 현재 산성 내에는 187세대 467명이 거주하고 있다.
오후 6시.
이윽고 수어장대에 올랐다.

수어장대(守禦將臺)와 청량당(淸凉堂).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제3호.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이다.
남한산성에 있던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성 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 27년(1751)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수어장대 2층 내부에는 무망루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하여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현재 무망루 편액은 수어장대 오른편에 보호각을 지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보관하고 있다.
청량당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이 사당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 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이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송씨는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 죽었다.
이회는 죽을 때 자신이 죄가 없으면 매 한 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예언을 했는데
과연 매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잘된 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다.
원래의 청량당은 6.25 전쟁 때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서장대가 있는 산 이름이 청량산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 지었다.

수어장대의 오른편에는 원래 수어장대 내부에 걸려 있었다는 편액이 전시되어 있었다.
타국의 침략을 받아 겪은 수모를 잊지 말자는 정신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할 것이다.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라서 수어장대 부근은 약간 어수선했다.
청량당은 수어장대 바로 아래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앞서 들러보았던 다른 사당들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수어장대를 뒤로하고 서문으로 향했다.
수어장대에서 서문까지는 600m 떨어져 있었다.
소나무 숲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도시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산속에서는 밤이 더 빨리 찾아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숲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때문이리라.
오후 6시 10분.
서문에 도착했다. 하산을 시작한다.
산을 내려가는 도중에도 산속의 밤은 깊어져만 갔고
발아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 확보가 어려워졌다.
지난 봄 여주 이포보를 다녀왔을 때 플래시가 없어서 고생했었다.
이날도 플래시를 챙기지 않았지만 핸드폰 불빛을 플래시 대용으로 삼아 조심조심 산을 내려왔다. 

갈림길은 어느 길을 선택하든 정상을 향하고 있으므로 산을 오를 때에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지만 
하산할 때에는 무지하게 신경이 쓰인다. 길을 잘못 선택하면 낯선 동네로 내려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골마을출발점으로부터 남한산성 서문까지는 그리 긴 코스가 아니기에 다른 곳으로 빠질 가능성은 적어 보였지만 
 여하튼 갈림길이 등장할 때마다 어느 길로 올라왔었지 스스로에게 자문하면서 길을 골랐다.
등산로에 목책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림으로써 선택에 대한 두려움은 많이 줄어들었다.
산을 내려오기까지 한 시간 남짓 소요된 것 같다.
편의점에서 캔커피로 목을 축인 후 자전거에 올라타고 귀로에 올랐다.

올림픽공원에 도착하니 조이올팍페스티벌의 이날 공연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88잔디마당에선 모스틀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추어 
꿈을 이룬 테너로 유명한 폴 포츠가 공연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덧글

  • 준짱 2012/10/21 21:50 # 삭제 답글

    무당벌레 색깔이 죽이네. 알록달록한 마우슨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암문이 16개나 된다니 넘 많은 거 아니냐. 난 성이란 것에 비밀문이 그렇게 많다는 소린 첨 들었다.
    암튼 많이도 돌아다녔구나. 그래도 해지기 전에는 산에서 내려오렴. 위험해.
  • 오오카미 2012/10/22 12:30 #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두 시간만에 남한산성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찾아보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관광명소가 의외로 많이 있는 것 같다.
    단풍 구경도 할 겸 같이 산에 오를 수 있다면 좋겠다만. 조만간 연락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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