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단편 지.감.정(智・感・情) - 쿠로다 세이키(黒田清輝) 2012/04/02 15:34 by 오오카미

智・感・情 - 黒田清輝
1897년 제2회 하쿠바카이(白馬会)전에 「智・感・情」의 제목으로 출품한 삼부작. 
수정을 가한 후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 나부습작(裸婦習作. Étude de Femme)이란 제목으로 출품하여 은상을 수상했다.

일본여성 3명을 그린 이 그림은 금색 배경 속에 실물 크기의 여성을 사실적으로 그려 넣어서 
당시 관객들에게 실제 사람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강한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요미우리신문(読売新聞) 1900년 11월 29일 기사에 의하면
작가는 가운데 그림 感에 Impression, 오른쪽 그림 智에 Ideal, 왼쪽 그림 情에 Real의 의미를 담았다고 하고,
시사신보(時事新報) 1900년 12월 12일 기사에 의하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된 사상인 이상(理想), 인상(印象), 사실(写実)를 제목인 智・感・情의 글자로 표현했다고 한다.
일본사회에 누드에 대한 이해를 일깨웠다는 점과 일본 여성 체형의 이상형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가진 작품이다.

지난 일요일에 시청했던 명작스캔들에서 이 그림을 다루었기에
이 작품과 쿠로다 세이키에 관하여 조사를 해 보았다.



나체화 논쟁(裸体画論争) 

1895년 4월, 제4회 국내권업박람회(内国勧業博覧会. 동년 4월~7월)가 쿄토에서 개최되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쿠로다 세이키는 "아침 단장(朝妝)"을 출품하여 묘기(妙技)2등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박람회 개최 기간 동안 나체화(누드)라는 이유로 이 작품은 세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작품을 질타한 당시의 신문기사와 독자투고는 풍기상의 문제를 비판의 근거로 들고 있는 것이 많았다.
화가들조차 나체화를 그리기를 주저했고 또한 누드 혹은 나체화에 대한 관헌의 단속도 심했던 당시에
쿠로다가 과감히 나체화를 공개한 것은 일본의 미술계와 사회를 도발 또는 계몽하려는 의식이 강했다고 볼 수 있겠다.
박람회 심사위원장이 쿠로다의 그림을 비난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여 그의 그림은 계속 공개되었다.
쿠로다는 일본 국내에서는 침묵하고 있었으나 구미에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나체화를 춘화(春畵)와 동일시하는 견해가 도처에 널려 있다. 나체화를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세계의 보편적인 미적 감각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일본 미술의 장래에 있어서도 결코 좋지 않다.
나체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오히려 장려해야만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리들이 뭐라고 지껄이든
상관할 바 없다. 언젠간 내가 이길 테니까. 어쨌든 나는 이 그림과 흥망을 함께 할 각오다."

그 후 쿠로다는 미술 교육현장에서 누드를 그릴 것을 권장했고 지.감.정(智・感・情)을 비롯하여
많은 나체화를 그렸고 전람회에 출품했다. 그러나 일반에게 공개할 때에는 관헌의 지시에 의하여
나체를 모티브로 한 작품만을 전시하는 특별실에 전시되거나 여인의 하반신을 천으로 가리고 전시하는 등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나체화를 둘러싼 저항과 규제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 쿠로다 세이키(黒田清輝. 1866 - 1924) - 메이지(明治)부터 타이쇼(大正) 시기에 걸쳐서 활약한 서양화 화가이자 미술교육가.
1884년부터 1893년까지 프랑스에서 유학. 처음엔 법학을 배울 생각이었으나 파리에서 일본 화가와 미술상과 교류하며
그림을 배우기로 마음을 바꾸어 외광파(外光派) 프랑스 화가 라파엘 콜랭(Raphael Collin)에게 미술을 사사했다.
외광파 양식의 회화를 배우며 살롱에 출품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고 귀국 후에는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외광파 양식을 일본내에 전수하여 일본 서양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896년에 토쿄미술학교(東京美術学校. 현재의 토쿄예대)에 서양화과가 신설될 때 교원으로 임용되어
교과과정에 해부학과 누드모델을 이용한 인체 데생 과목을 설치하는 등 미술교육자로서 미술계에 공헌한 바도 크다.
제국예술원(帝国美術院. 현재의 일본예술원) 원장, 귀족원(貴族院) 의원 등을 역임했다.

* 외광파(Pleinairisme) - 19세기 프랑스에서 등장한 회화사의 한 경향.
아틀리에의 인공 조명을 거부하고 실외에서 태양광선 아래 자연의 밝은 색채를 직접 묘사하는 것을 추구했다.
실외에서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그림의 경향은 인상파(Impressionnisme)와 유사하다고도 할 수 있으나
인상파가 살롱(官展. 프랑스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공식미술전람회)에 반기를 드는 자세를 취했던 것에 반하여
외광파는 인상파의 기법과 아카데미의 주제를 절충하는 자세를 보이며 살롱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 하쿠바카이(白馬会. 1896~1911) - 1896년 9월에 쿠로다 세이키를 중심으로 발족한 서양화 단체.
1893년 프랑스에서 돌아온 쿠로다는 일본 최초의 서양화 단체인 메이지비주츠카이
(明治美術会. 1889~1901)에 입회하여 감각적이고 밝은 화풍의 인상파 기법을 전파했다.
쿠로다의 화풍은 종래의 화풍과 비교된다 하여 신파(新派) 또는 외광파로 불리게 되었고 
쿠로다는 단체를 탈퇴 후 뜻을 같이 하는 화가들과 하쿠바카이를 결성했다.

쿠로다 기념관(黒田記念館)


아침 단장(朝妝. 1895)
1895년 쿄토에서 열린 국내권업박람회에 출품된 이 그림은 당시 일본사회에 충격을 던졌다.
일본 서양화의 첫 나체화로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나 전쟁 때 소실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호반(湖畔. 1897) 
제2회 하쿠바카이전에는 피서(避暑)란 제목으로 출품되었고, 파리만국박람회에 지.감.정과 함께 출품된 작품이기도 하다.
모델은 친구의 소개로 만난 당시 23세의 게이샤 카네코 타네코(金子種子)이고 후에 쿠로다의 부인이 된다.
그림의 배경은 토쿄 근교의 대표적 휴양지인 하코네(箱根)의 아시노코(芦ノ湖).
들판(野辺. 1907)

덧글

  • 2012/04/02 16:0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준짱 2012/04/03 09:39 # 삭제 답글

    팔동작이 무슨 수신호라도 보내는 것 같구나.
    몸이 퉁퉁한게 역쉬 100년 전 미인상이야.ㅎㅎ
  • 오오카미 2012/04/03 11:12 #

    지.감.정이란 제목과 연관지어 보면 여인들의 포즈가
    생각하는 여인, 온몸으로 느끼는 여인, 수줍어하는 여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