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타오르는 어둠속에서




한글날 오후에 대학로 티오엠(TOM) 2관에서 연극 타오르는 어둠속에서를 관람했다.
스페인의 극작가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Antonio Buero Vallejo. 1916-2000)가
1950년에 쓴 동명희곡 En la ardiente oscuridad(In The Burning Darkness)가 원작이다.



극단 가원 제작, 강지수 연출이고 공연시간은 2시간이다.
이순재 배우가 예술감독으로 참여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연극의 공간적 배경은 돈 파블로 교장이 운영하는 맹인학교다.
교장은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어린 학생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서 이 학교를 열었다.
학생들의 재잘대는 대화과 활기찬 웃음소리로 연극은 막을 올린다.
덩치가 크고 짙은 선글라스를 쓴 미겔린이 다른 학생들보다 뒤늦게 교실에 입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교실 안 학생들의 행동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있다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맹인학교라고 쓰여 있던 팸플릿의 시놉시스가 잘못된 것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였다.
다른 학생들은 물론이고 미겔린조차도 지팡이 없이 무대 위를 걸어다녔으므로
그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가 아니었다면 맹인이라는 것을 인지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들이 모두 맹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은 잠시 후 등장하는 견학생 이그나시오에 의해서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전학을 알아보기 위해서 이 학교를 방문했다.
흰지팡이(시각장애인용 지팡이)를 바닥에 두드리며 교실에 나타난 그를 향해서
교실 안의 학생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트린다.
조롱당하고 있다고 수치심을 느낀 이그나시오는 학생들을 향하여 소리친다.
내가 불쌍한 장님인 게 보이지 않느냐고. 동정은 못할망정 어떻게 비웃을 수 있냐고.
그러자 학생들이 웃으며 대답한다. 우리도 장님인데 너를 어떻게 볼 수 있겠냐고.
너희들의 분위기에선 장님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았다며 거짓말하지 말라고 이그나시오가 반박하자
학생들은 이그나시오에게 너도 우리처럼 지팡이 없이 걸어다닐 수 있게 될 거라며
지팡이 따위는 수위실에 맡기라고 대답하지만 이그나시오는 결코 손에서 지팡이를 놓지 않는다.

학생들이 지팡이 없이 교내를 걸어다니고 운동장에서 공을 차거나 미끄럼틀을 타고 놀 수 있었던 것은
교장의 가르침에 따라서 건물의 구조와 각 방에 놓인 사물의 위치 등을 외우고
오랫동안 반복하여 연습을 해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페드로 역 전태욱, 로리타 역 유하영, 에스페란사 역 박서연, 안드레스 역 허준영 배우.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 근묵자흑,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린다.
이들 표현이 이 연극을 보면서 뇌리에 떠오른 느낌들이다.
이그나시오의 등장으로 맹인학교의 평화가 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앞을 볼 수 없음에도 희희낙락하며 현실에 만족한 삶을 살고 있던 학생들에게
이그나시오는 자신들이 앞을 볼 수 있는 정상인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주지시킴으로써
평온했던 학생들의 가슴에 불안감을 일으키고 그들의 인간관계에까지 균열을 불러일으킨다.



돈 파블로 역 장형준, 페피타 부인 역 한솔, 이그나시오의 부친 역 한상연 배우.

돈 파블로 교장은 다른 학생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그나시오에게도 지팡이 없이 생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그나시오를 학교에 받아들였으나
그로 인하여 학생들에게 동요가 일어나자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게 된다.

페피타 부인은 교장의 부인이고 앞을 볼 수 있는 정상인이다.
맹인도 정상인과 결혼할 수 있는 좋은 예라며 학생들은 자랑스럽게 떠벌렸지만
이그나시오는 페피타 부인이 교장과 결혼한 것은 그녀가 아주 못생겼기 때문일 거라고 폄훼한다.



후아나 역 정해인, 엘리사 역 문고운, 미겔린 역 김신우 배우.

후아나는 학생들의 리더인 카를로스의 여자친구다.
학교를 견학 왔던 이그나시오가 내가 여기에 오면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불러올 거라며
전학 오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가려고 했을 때 그를 말렸던 인물이 바로 후아나였다.
너도 이곳에 적응하게 될 거라며 후아나는 이그나시오에게 따뜻한 손길을 건넸던 것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 때문에 맹인이 정상인들에 비해서 열등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며
논리 있게 자신의 주장을 펴는 이그나시오에게 여학생들은 마음이 끌리게 되었고 후아나 역시 그랬다.

엘리사와 미겔린은 연인 사이다.
다른 여학생들은 전학생 이그나시오에게 관심을 보이지만 유달리 엘리사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저 아이는 학교에 나쁜 영향을 가져올 거라는 걸 첫만남에서부터 직감했기 때문이다.
엘리사는 그런 속마음을 단짝친구인 후아나에게 털어놓았으나 후아나는 괜찮을 거라며 엘리사를 달랬다.
그러나 엘리사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연인인 미겔린조차 엘리사와 함께 지내는 것보다
룸메이트인 이그나시오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면서 엘리사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간다.



카를로스 역 류성재, 이그나시오 역 김남용 배우.

학생들과 선생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는 카를로스는 맹인학교 학생들의 리더적 존재다.
이그나시오로 인하여 학교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교장은 학교에서 그를 내쫓고 싶어하지만
정당한 명분도 없이 학생을 퇴학시키면 학교의 평판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여 그러지 못한다.
그 대신 교장은 카를로스를 불러서 부탁을 한다. 이그나시오가 학교를 그만두도록 설득해 달라고.
목적을 위해서 어린 학생을 이용한 교장은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파렴치한 어른 또는 그릇된 기성세대의 전형이라고 책망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대목은 그만큼 카를로스라는 인물이 타인의 의지가 되는 존재라는 것을 방증하는 예이기도 했다.

카를로스가 체제수호자라면 이그나시오는 체제파괴자다.
현실의 부정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이그나시오에 의해서 맹인학교는 검게 물들어간다.
평온했던 타인들의 삶을 깨부순 주제에
이그나시오는 한 줄기 빛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며 꿈 같은 소리를 거리낌없이 지껄인다.
무지한 시민들을 선동하는 좌익 운동가처럼 말이다.

결국 카를로스는 결단을 내린다.
이그나시오가 학교 전체를 파멸의 낭떠러지로 몰고 가기 전에 그를 파멸시키기로.

연극 타오르는 어둠속에서는 불순분자가 사회 전체에 미치는 악영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또한 인간의 한계를 지적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후아나를 비롯한 학생들은 온정으로 이그나시오를 대했고 그가 변화하여 조직에 동화되기를 바랐으나
이그나시오는 그들의 바람을 철저히 외면했고 그의 주장만을 완강하게 고집했다.
수많은 학생들이 이그나시오의 논리에 굴복하고 변심하여 체제파괴자와 같은 생각을 갖기 시작하게 되었고
논리로는 이그나시오에게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카를로스는 무력행사로 사태를 매듭짓는 방법을 선택하고 만다.
작가는 여러 등장인물들을 통하여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한계가 있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그나시오는 학교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고 있던 학생들에게 학교 밖에는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과연 너희가 학교 밖에서도 지팡이 없이 걸어다닐 수 있겠느냐며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라고 다그쳤다.
그렇기에 이그나시오야말로 올바른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관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에 만족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의 세상은 거짓 위에 세워진 모래성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들의 현실을 파괴하는 것은 과연 올바른 행동일까.





연극 타오르는 어둠속에서 커튼콜.

흐르고 있는 배경음악은 영화 피서지에서 생긴 일 (A Summer Place, 1959)의 테마송이다.
주인공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연극의 결말과는 대조적으로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감미로운 선율의 음악이 흐르니 그 위화감이 묘한 여운을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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